이인자 시인 / 어느 움집에서
당신은 이 별에서 만난 내 첫 번째 남자 후빙기를 건너, 미개한 시절 생선을 잘 굽는 착한 아내인 나와 고기를 잡던 내 아들과 도토리를 곧잘 줍던 어린 딸과 더불어 한강변, 네다섯 평 움집에서 처음 행복을 가르쳐 주던 남자
자랑스러운 무기였던 돌화살촉과 하나뿐이던 부엌살림, 빗살무늬토기 그래도 아궁이가 환히 달아오를 때면 시린 등을 토닥토닥거려주던 숱 많고 머리 긴, 저기 저 남자
사냥을 떠나기 전날 밤 돌화살촉을 다듬고 또 다듬던 날 닳아지는 건 돌뿐이 아니라, 떠나보내는 마음도 함께 일 텐데 어느 짐승의 먹이가 되었는지 꽁꽁 얼어붙은 후빙기를 지나도록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던 내 생애 첫 번째 남자를
다시 만났다. 암사동 선사 유적지 어느 움집에서
이인자 시인 / 하나님과의 티타임
공지천 호수가 하나님의 커피 잔이라고 삼월 끗발, 내리는 눈은 한 스푼 두 스푼으로는 평생 헤아릴 수 없는 확 풀어헤친 한 자루 프림 가루처럼 소복내리다, 살살살 녹는다 하나님의 프림 가루로 선택된다는 것은 티타임을 갖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 하나님은 프림만 풀어대시며 무슨 말이든 해보라고 다그치신다 사실 각설탕처럼 뽀로통하게 삐쳐있는 불만들이 어찌나 많은지 단번에 확, 프림 자루처럼 쏟아버릴까 하다 이곳, 지금 나 있는 곳에서 아무리 헤엄쳐도 하나님 커피 잔 속 야야, 이쁘게 보여야지 봄 아궁이에 불 지피시느라 바쁘신 하나님 오늘은 그만 성가시게 해드리는 게 좋겠구나 싶어 하나님, 내일 다시 뵈요. 했더니 삼월 마지막 프림 커피 훌훌 넘겨 잡수시고는 이제는 늙어서인지 블랙커피는 입에 좀 쓰다며 다음에, 이 다음 겨울에 보자 하시는 입맛 한번 까다로우신 하나님과의 티타임 한때
이인자 시인 / 우주의 음파
나는 우주 간첩 어제도 태양계의 맨 끝별, 해왕성에서 발신이 왔다 위이잉 125 헤르츠 귀를 세우고 주파수를 잘 맞춰야 해 지구인이 풀지 못한 우주의 숙제를 혹은 SF 영화처럼 지구인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를 특별히 선택된 나에게 전달할 것 같아 실패하면 임무 미완수 내 안의 더듬이를 세우고 주파수를 맞춰 우주의 음파를 모조리 해독하는 날 끝까지 믿어줬던 나의 신복을 거닐고 그곳으로 돌아가리라 믿고 있는 나에게 딱 잘라, 의사는 말했다
이명입니다
그날 이후, 우주는 더 이상 내게 임무를 발신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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