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윤주 시인 / The 발레리나
분홍빛 토슈즈 속에 온몸의 뿌리를 담고 한 점을 딛고 하나의 점으로 선다 비무장지대의 꽃으로 피는 순간이다
무음으로 보여지는 발차기의 소란한 채찍질 속에 핑그르르 시린 눈빛으로 풍요로워지는 팽이처럼 중심축의 시선은 수십 번을 돌아도 망설임 없이 한 지점만을 붙들고 있다
흔들림 없는 길을 지나온 몸짓은 수천만 번의 잔근육질로 칼날이 되었다 보다 더 아픈 것은 무딘 날로 생살을 찢는 것 문드러지는 꿈들이 터져 나온다면 울음 같은 수액은 진득한 딱쟁이로 남아 흉터가 될 테니까
빛을 뚫고 뻗치는 손끝이 얼음을 깨듯 날카롭다 예리하게 슥 - (‘아라베스크 하게 ......’) 현실의 소리 쓸어 올린다 단칼에 잘리는 면에서는 어지럼증이 투명하게 흐른다
좌회전하는 우주에서 우회전하는 발레리나 더 크게 돌고 있는 무대에서 발끝으로 돌리는 세상은 대롱 끝에서 퍼져나오는 환상의 원형인가 한 발로 서는 꽃대에도 오롯이 아득해지는 외길 발끝으로 서기 위해 지은 리본의 매듭 속에 이 순간을 향해 달려온 오랜 잔상이 하얀 꽃잎으로 흩날린다
발등이 일자로 뻗칠 때마다 낡은 아치 속으로 발끝을 세우는 고요 리본 없는 신발로 어린 발레리나 지켜보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3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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