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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송이 시인 / 소심한 책방 외 2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5.

박송이 시인 / 소심한 책방

짧아지는 연필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

딱딱한 솔방울을 궁굴리며 궁굴리며

용기의 얼굴을 내밀고 가야겠다는 생각

손바닥 같은 숲속 작은 사람들 곁에서

우산을 펼쳐야겠다는 생각

신앙을 가져야겠다는 생각

첫 시집을 내고 예술가라기보다는

생활인에 가까워졌다는 생각

시집을 팔아야겠다는 생각

깨진 보도블록 탓하지 않으면서

까인 무릎을 껴안아 줘야겠다는 생각

저마다 바다를 띄우고

그마다 닻을 품고

이마다 파도를 버틴다는 생각

쓰러진 볏잎들을 묶어 줘야겠다는 생각

도탑게 도탑게 골목을 돌 때마다

툭툭 솔방울이 떨어지고

작은 시집을 파는 책방이 문을 연다

똑똑 문을 열면 낱말들이 몰려와

슬픔이 무사하다는 생각


 

 

박송이 시인 / 나무항구 3

잘 삶아진 옥수수를 입에 물고

죽림 분기점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나는 그것을 직감했다

무언가 들이닥쳤을 때 그것이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쳤거나 비켜섰거나 했을 때

어느 쪽으로든

죄책감에 무방비하다는 걸 말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옥수수 알맹이 같은

이 한 줄 따위로도 이 썩을……

동정하는 편 쪽에 설 수 있다

고라니야, 고속도로엔 건널목이 없단다

ㅡ시집 『나는 입버릇처럼 가게 문을 닫고 열어요』

 

 


 

 

박송이 시인 / 나의 시는 나의 육체를 지배하지 못하고

나의 시는 나의 육체를 지배하지 못하고

나의 시는 나의 영혼을 가지어 본 적이 없고

나는 멀리 떠나는 자의 딱딱한 신발을 닮았고

나는 어깨를 위해 울어 본 적이 없음을 후회하고

나의 식사는 언제나 불평과 망각 사이에서 허술했고

그 빈약함으로 나의 늙은 시는 나를 쉽게 잊어버렸고

낮과 밤이 둥글어 가는 톱날 바퀴의 시작점은 얼마나 무의미한지

혀 말고 다른 언어가 있나

혓바닥 말고 다른 고집이 있나

종다리야 종아리야

나는 너의 지탱을 배우고 있나

-시집 『나는 입버릇처럼 가게 문을 닫고 열어요』에서

 

 


 

박송이 시인

1981년 전북 순창 출생. 한남대 국문과와 同 대학원 국문과 박사학위 취득. 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2017년 한남문인상 젊은작가상. 2013년 대산창작기금 시부문 선정. 시집 <조용한 심장> <나는 입버릇처럼 가게 문을 닫고 열어요>. 동시집 『낙엽 뽀뽀』. 대산창작기금과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