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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인자 시인 / 어느 움집에서 외 2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5.

이인자 시인 / 어느 움집에서

 

당신은 이 별에서 만난 내 첫 번째 남자

후빙기를 건너, 미개한 시절

생선을 잘 굽는 착한 아내인 나와

고기를 잡던 내 아들과

도토리를 곧잘 줍던 어린 딸과 더불어

한강변, 네다섯 평 움집에서

처음 행복을 가르쳐 주던 남자

 

자랑스러운 무기였던 돌화살촉과

하나뿐이던 부엌살림, 빗살무늬토기

그래도 아궁이가 환히 달아오를 때면

시린 등을 토닥토닥거려주던

숱 많고 머리 긴, 저기 저 남자

 

사냥을 떠나기 전날 밤

돌화살촉을 다듬고 또 다듬던 날

닳아지는 건 돌뿐이 아니라,

떠나보내는 마음도 함께 일 텐데

어느 짐승의 먹이가 되었는지

꽁꽁 얼어붙은 후빙기를 지나도록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던

내 생애 첫 번째 남자를

 

다시 만났다. 암사동 선사 유적지

어느 움집에서

 

 


 

 

이인자 시인 / 하나님과의 티타임

 

 

공지천 호수가

하나님의 커피 잔이라고

삼월 끗발, 내리는 눈은

한 스푼 두 스푼으로는 평생 헤아릴 수 없는

확 풀어헤친 한 자루 프림 가루처럼

소복내리다, 살살살

녹는다

하나님의 프림 가루로 선택된다는 것은

티타임을 갖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

하나님은 프림만 풀어대시며

무슨 말이든 해보라고 다그치신다

사실 각설탕처럼 뽀로통하게 삐쳐있는

불만들이 어찌나 많은지

단번에 확, 프림 자루처럼 쏟아버릴까 하다

이곳, 지금 나 있는 곳에서

아무리 헤엄쳐도

하나님 커피 잔 속

야야, 이쁘게 보여야지

봄 아궁이에 불 지피시느라 바쁘신 하나님

오늘은 그만 성가시게 해드리는 게 좋겠구나 싶어

하나님, 내일 다시 뵈요. 했더니

삼월 마지막 프림 커피

훌훌 넘겨 잡수시고는

이제는 늙어서인지 블랙커피는 입에 좀 쓰다며

다음에, 이 다음 겨울에 보자 하시는

입맛 한번 까다로우신 하나님과의

티타임 한때

 

 


 

 

이인자 시인 / 우주의 음파

 

 

나는 우주 간첩

어제도 태양계의 맨 끝별, 해왕성에서 발신이 왔다

위이잉 125 헤르츠

귀를 세우고 주파수를 잘 맞춰야 해

지구인이 풀지 못한 우주의 숙제를

혹은 SF 영화처럼

지구인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를

특별히 선택된 나에게 전달할 것 같아

실패하면 임무 미완수

내 안의 더듬이를 세우고

주파수를 맞춰 우주의 음파를

모조리 해독하는 날

끝까지 믿어줬던 나의 신복을 거닐고

그곳으로 돌아가리라

믿고 있는 나에게

딱 잘라, 의사는 말했다

 

이명입니다

 

그날 이후, 우주는 더 이상 내게 임무를 발신하지 않았다

 

 


 

이인자 시인

1973년 서울에서 출생. 199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새의 덧신』(시안, 2012)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