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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하경 시인 / 공중그네 외 2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9.

김하경 시인 / 공중그네

 

 

우리 동네 공사장

18층 빌딩에 한 사내 줄타기 한다

 

공중정원에 사방팔방 스치는 바람 속

삶을 꿈꾸는 페인트공 손끝이 환하다

 

하늘을 팽팽히 버티는 시간

손때는 언제나 반질반질 윤기가 난다

 

지루한 녹물이 벗겨진 자리

늙은 부모와 자식 얼굴처럼 동그랗다

 

대롱대롱 외줄에 몸을 맡기고

벽면에 붙은 제 그림자를 따라 색칠하던 한낮

 

붓끝이 만난 그림자 언저리

2시 30분 방향의 시침과 분침처럼 찰칵거린다

 

시간은 언제나 과거가 되지만

새로 그린 그림 오늘 하늘에 꽃이 핀다

 

낡은 시간을 잡고 앉아있는 페인트공

고개 들고 바라보는 어린 눈망울을 의지한다

 

벽면에 환한 해가 뜬다

 

 


 

 

김하경 시인 / 도마 속의 삼족오(三足烏)

 

 

꿩을 다루는 주인 창을 던지듯 칼을 흔든다

 

고구려 왕릉에서 발굴된 예맥족들이

쌩쌩 불어오는 바람과 맞서 벽화 속에서 말타기 즐겼다

 

우거진 숲 속 분주하게 달렸던 광개토대왕

달아나는 새의 날갯짓 힘보다

앞을 겨눈 시간들 창은 적들의 전략 앞에 빠르게 꽂힌다

 

사라진 고구려의 삶

짐승을 쫓는 눈빛이 햇살 아래 반짝인다

 

엉덩이를 들고 말을 달리던 왕

흙속에 묻힌 지금

힘껏 던진 창살 여전히 심장에 번쩍거리고

꿩을 적중한 도마 위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다

 

북면 우주 꿩 요리 식당 주방

벽화 속 왕의 사냥터로 핏물이 흥건하다

 

날마다 하늘로 도망쳐야 할 꿩

지난날 나의 힘이라면

앞만 겨눈 사냥의 힘

산속에 흩어진 삼족오 피가 칼도마 위에 벽화로 물들었다

 

다다다다 도마 위의 칼소리 산등성이를 휘어잡고

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가 식당을 나온다

 

 


 

 

김하경 시인 / 미래도

 

 

시간이 하얗게 샌 오후

시장통 앉은 할머니는 늙은 호박을 박박 긁어내린다

아직 덜 여문 껍데기들 축축이 벗겨져

숟가락 아래 가묘 한 수북하다

이제 더 이상 할 말 없는 애호박을 보고

꽉 다문 입

마음속에 무덤 하나 풀어 놓는 건가

살점이 뚝뚝 떨어져도 깎아내고 있다

방울방울 진액이 맺힌 뜯겨진 살점

검은 머리가 하얗게 샌 늙은 호박 위로

진액이 눈물처럼 가묘 아래로 잔뜩 흐른다

코걸이가 대롱대롱한 아마존의 여인들도 마찬가지다

누런 호박은 밥이고 무덤이지만

흰머리로 늙은 시간은 여인들의 축축한 눈물인 것을

TV 속의 군데군데 이 빠진 아마존 여인들

푹 익은 호박죽 한 숟가락 받아먹을 줄 모르고 있다

암흑은 답답한 속마음을 끓어오르는 것이어서 꼭꼭 씹어 삼켜야 하는 것

덜 여문 애호박의 껍데기들은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눈물인 것

고무대야 속에 제 무덤을 다독다독 미래도를 조각하는 것

검은 머리가 흰머리로 기울어진 지금

끈끈한 진액이 여인들의 밑거름이었던 눈물이

반대쪽으로 떨어진 노을의 끝물은 더 붉다

작고 힘없는 그림자가 시장통 서쪽으로 기우뚱하다

바싹 늙은 할머니는 삼베 치마로 침을 닦고

숟가락 위에 누런 호박

봉분 한 삽

슬프다

 

-시집 <거미의 전술>에서

 

 


 

김하경 시인(1964~2016)

1963년 전북 익산 출생. 신구대학교 졸업. 2012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으로 등단. 2014년 <공중그네>로 전국 계간지 우수작품상 수상. 2015년 가을 첫 시집인 <거미으 전술>을 냈으나 갑자기 세상을 떠나 유고 시집이 됨. 전 양산 성모병원 원무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