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 시인 / 만사형통
책상에 수북 쌓인 개봉 안 된 우편물 꾹꾹 손가락 힘주고 눌러쓴 편지는 한 통 없고 죄다 돈을 내놓으시라는 엄한 명령이다 거리로 나서니 우르르 밀려드는 간판들 (아마 이것 바닥에 쫙 펼치면 지구를 덮고도 남을 거야) 모두 나 좀 먹여살려주세요 하는데 누구 하나 내 밥그릇에 밥 한 술 보태줄 위인은 없다 (만약 있다면 정말 위대한 사람일 텐데) 전화번호부만큼 생활정보지는 두꺼워지고 글씨는 작아져 사람들의 일상은 조바심으로 팍팍하다 다시 집으로 와 바닥에 몸을 누이니 출구 없는 부채와 온기 잃은 채권의 숫자만 뇌하수체에서 뒤범벅이다 아, 만사 가벼워지고 형통될 그날은 언제일지 천장 사방팔방 무늬를 보며 스르르 눈을 감는다
-시집 『낙법』, 《문학공원》에서
권순진 시인 / 기춘 아지매
성주군 선남면 오도리 기춘 아지매의 삶은 촛불 이전과 이후로 확실히 갈라졌다. 사드란 괴물이 들어선다는 소문을 듣기 전에는 심산 김창숙이란 인물이 이 고장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알 턱이 없고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자기랑 나이는 비슷한데 얼굴은 엄청 더 예쁜 탤런트 김창숙은 안다.
이 나라에 ‘껍데기는 가라’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외치다 간 신동엽 시인도 처음 들었다. 같은 이름의 개그맨은 가끔 보아서 안다.
김소월 윤동주의 시 한두 편은 제목도 알아 완전 맹탕은 아니라 자부했건만. 이참에 몇몇 시인의 이름을 새로 주워들었다. 집안동생이 일러주었는데, 시를 잘 써 억대의 상금을 탔다는 문인수란 시인의 고향이 성주란 사실도 새롭게 알았다. 군청 앞마당에서 시를 읽어주던 멀끔한 젊은이 김수상 씨도 시인인 것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놈의 사드 때문에 신간은 고되었지만 먹물은 좀 먹은 셈이다. 기분 더럽게 성 빼고 자기와 이름이 같은 나치장교를 닮은 사람, 미꾸라지란 별명의 우씨란 사람이 청문회에서 모른다 안했다 앵무새처럼 주낄 때, 전 같으면 그런가보다 했겠는데 분통이 터져 주둥이를 쥐어박고 싶었단다.
자기가 뽑은 국회의원도 창피해 죽겠단다. 매양 가던 길로 붓 뚜껑을 찍어온 제 손가락을 분지르고 싶었단다.
- 사드배치 반대 촛불집회 200일 기념 시집 <성주가 평화다>(2017, 한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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