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권순진 시인 / 만사형통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9.

권순진 시인 / 만사형통

 

 

책상에 수북 쌓인 개봉 안 된 우편물

꾹꾹 손가락 힘주고 눌러쓴 편지는 한 통 없고

죄다 돈을 내놓으시라는 엄한 명령이다

거리로 나서니 우르르 밀려드는 간판들

(아마 이것 바닥에 쫙 펼치면 지구를 덮고도 남을 거야)

모두 나 좀 먹여살려주세요 하는데

누구 하나 내 밥그릇에 밥 한 술 보태줄 위인은 없다

(만약 있다면 정말 위대한 사람일 텐데)

전화번호부만큼 생활정보지는 두꺼워지고 글씨는 작아져

사람들의 일상은 조바심으로 팍팍하다

다시 집으로 와 바닥에 몸을 누이니

출구 없는 부채와 온기 잃은 채권의 숫자만

뇌하수체에서 뒤범벅이다

아, 만사 가벼워지고 형통될 그날은 언제일지

천장 사방팔방 무늬를 보며 스르르 눈을 감는다

 

-시집 『낙법』, 《문학공원》에서

 

 


 

 

권순진 시인 / 기춘 아지매

 

 

 성주군 선남면 오도리 기춘 아지매의 삶은 촛불 이전과 이후로 확실히 갈라졌다. 사드란 괴물이 들어선다는 소문을 듣기 전에는 심산 김창숙이란 인물이 이 고장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알 턱이 없고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자기랑 나이는 비슷한데 얼굴은 엄청 더 예쁜 탤런트 김창숙은 안다.

 

 이 나라에 ‘껍데기는 가라’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외치다 간 신동엽 시인도 처음 들었다. 같은 이름의 개그맨은 가끔 보아서 안다.

 

 김소월 윤동주의 시 한두 편은 제목도 알아 완전 맹탕은 아니라 자부했건만. 이참에 몇몇 시인의 이름을 새로 주워들었다. 집안동생이 일러주었는데, 시를 잘 써 억대의 상금을 탔다는 문인수란 시인의 고향이 성주란 사실도 새롭게 알았다. 군청 앞마당에서 시를 읽어주던 멀끔한 젊은이 김수상 씨도 시인인 것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놈의 사드 때문에 신간은 고되었지만 먹물은 좀 먹은 셈이다. 기분 더럽게 성 빼고 자기와 이름이 같은 나치장교를 닮은 사람, 미꾸라지란 별명의 우씨란 사람이 청문회에서 모른다 안했다 앵무새처럼 주낄 때, 전 같으면 그런가보다 했겠는데 분통이 터져 주둥이를 쥐어박고 싶었단다.   

 

 자기가 뽑은 국회의원도 창피해 죽겠단다. 매양 가던 길로 붓 뚜껑을 찍어온 제 손가락을 분지르고 싶었단다.

 

- 사드배치 반대 촛불집회 200일 기념 시집 <성주가 평화다>(2017, 한티재)

 

 


 

권순진 시인

1954년 경북 성주 출생,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 2001년 《문학시대》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낙법落法』 『낙타는 뛰지 않는다』와 시해설서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詩』가 있음. 계간  『시와 시와』 편집주간, 대구일보 객원논설위원. 대구일보에 10년째 시 칼럼 연재 중. 제12회 귀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