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철 시인 / 거꾸로 가자
짧게 가자 빠르게 가자 무의미하게 가자 그녀는 잊기 위해 드라마로 간다
그녀는 알레고리에 익숙하다 판타지에 익숙하다 리얼리즘은 천박해 부담스러워
상징적으로 가자 모자 쓰고 가자 가리마도 가리고 바로 클라이맥스로 간다
한일강제합병은 모른다 진주가 어디 붙어 있는 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에 익숙하고 온갖 암호와 예측에 충분히 익숙하다
나는 거꾸로 가자 예측 불가능하게 가자 벌거벗은 몸뚱이로 가자 저 강변 항하사 같은 금모래밭 남풍에 반짝이며 팔랑이는 미루나무 이파리 그 오르가슴을 나는 잊지 못한다
윤재철 시인 / 생은 아름다울지라도
달리는 고속버스 차창으로 곁에 함께 달리는 화물차 뒤 칸에 실린 돼지들을 본다 서울 가는 길이 도축장 가는 길일 텐데 달리면서도 기를 쓰고 흘레하려는 놈을 본다
화물차는 이내 뒤처지고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저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생각한다 아름답다면 마지막이라서 아름다울 것인가
문득 유태인들을 무수히 학살한 어느 독일 여자 수용소장이 종전이 된 후 사형을 며칠 앞두고 자신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생리를 보며 생의 엄연함을 몸서리치게 느꼈다는 수기가 떠올랐다
생은 아름다울지라도 끊임없이 피 흘리는 꽃일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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