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시인 / 자두 f
두려움일 수 있고 봉지일 수 있고 아스팔트일 수 있다 이것이 자두의 힘이다 자두의 힘이 가능하다면 가능한 만큼 출렁대고 있다 멀리서부터 자두가 느껴진다 폭발된 맛이 느껴진다 저녁의 모양으로 바로 선다 피시방으로 가는 자두 자두의 보폭은 다정해 자두의 어둠은 자두의 죽음보다 강하고 비로소 자두의 어깨를 만져본다 자두여 자두를 버린다면? 자두의 탄생을 잃는다면? 벌벌 떠는 나에게서 자두가 열린다면? 자두 두 개가 꼭 붙어서는 무한대로 번식한다 ‘자두 에프’ 당돌한 명명 자기복제의 자두와 자두들 왜 자두냐고 물으면 그것은 자두가 보았으므로 삼천원어치의 자두가 나뒹굴었으므로 계단을 타고 다 터지면서 나타났으므로
울지
다리 없는 것이 몸 전체로 힘을 주니 안으로 근육을 일으키니 그것이야말로
절대 자두여야만 한다
-시집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
김기형 시인 / 놀라운 목소리
막 펼친 식탁보, 그곳에 앉은 우리들의 환한 얼굴이 그늘로 뚝뚝 떨어집니다. 어둠이 얼굴에서 몰려나올 때 얼굴에 남은 표정은 어둠을 대신하여 녹고. 가슴 앞으로 날지 못하는 새들이 내려앉지요. 이렇게 묽은 얼굴은 처음이다. 소리가 울릴 것 같은데 아무런 동작도 없이 얼굴이 떠나가고 저녁이 지나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말 못하는 우리가 새와 함께 몸을 열고 있습니다. 뜰이었다가 새이길 반복하는 사방에서 도착하는 목소리. 노을입니다. 노을을 그려요. 서로의 손을 붙들고 계속되는 원을 그리는 것입니다. 뺨이 붉어질 때까지, 밀리지 않는 바람이 뜰의 나무를 흔들어 기척으로 알려오는 때까지, 둥근 자리에 서서 우리의 발자국을 하나둘 셉니다. 새로운 인사를 만들어요. 각자의 궤적 위로 올라 이끌리듯 안기는 인사. 부풉니다. 숨이 숨으로 나가서 세상을 뿌옇게 만들어버리면 좋아요. 단단한 발음으로 말합니다. 만약 어떤 색을 흰색으로 볼 줄 안다면 그래서 우리가 자주 눈을 마주치며 오래오래 이 시간을 빗금으로 밧줄로 이어붙일 수 있다면 이곳에 놓이는 우리가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젖은 빛 굵은 글씨 고르게 퍼지는 자신을 응답처럼 맞이할 수 있다면 당신의 목소리 당신은 목소리로 불길을 세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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