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후 시인 / 동백꽃 활자
아버지는 식자공이었다
모든 것 다 말아먹고 주머니에 삼천 원 넣고 동백을 화분에 담아 서울로 왔다 우리도 아버지 따라 동백과 상관없이 서울로 왔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동백만 바라보셨고 엄마는 자주 눈을 흘겼다 청춘의 습관대로 아버지는 꽃 이파리에 자기 내력을 식자하고 수액을 잉크 삼아 꾹꾹 찍어놓은 활자들이 조판을 짰다 우리는 아버지 활자와 상관없이 키를 키워갔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와 상관없이 동백은 피고 동백꽃은 자기가 활자라고 우기고 있다 우리는 동백꽃을 보며 아버지의 신간을 읽는다
김은후 시인 / 석류꽃 시집
남광 인쇄소 가는 길목 어디쯤 낮은 굴뚝이 있었다 굴뚝 뒤 계집아이 둘 쪼그리고 앉을 만한 틈이 있었고 이따금 거기서 활자 몇 개씩 꺼내 먹었다 일곱 살 계집아이가 들고 가기에 아버지 도시락은 무거웠고 보자기 매듭 한 번도 풀지 않고 가기에는 그 길은 너무 길었다
아버지는 다시 식자를 하고 새로 활자판을 짜곤 했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 귀가 시간은 늦어지고 봄날의 페이지는 두툼해졌다 가방 속 빈 도시락에 파래 묻은 센베이 과자가 달각거렸고 세모를 부셔 먹는 소리가 톡톡거렸다
아버지의 활자를 꺼내 먹은 탓으로 과자들이 시집을 찍어내었다 석류꽃 피어 있던 시집으로 계집아이는 글자를 익히고 학교에 갔다 조금씩 떼어 먹던 활자 맛은 두근거리는 맛이었다
교실 안에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운 글자들을 아버지 도시락에 담았다 낮은 굴뚝이 있던 그 길을 찾는 꿈을 꾸고 시집을 펼친다 꿈속에서는 늘 내가 훔쳐 먹은 글자들로 조판하는 아버지가 있고 나는 측은이 라는 글자를 본다
일곱 살은 심부름하기 좋은 나이였고 또한 한눈에 당부를 빼앗기던 나이였다 찾고 싶은 기억이 일곱 살 한눈 팔던 그곳에서 몇 쇄 인지도 모를 시집을 찍고 있다
김은후 시인 / Pink Moon
그림자가 진달래술통을 안고 넘어졌어요 달 이쪽 끝에서 달 저쪽 끝까지 핑크
손그림자 놀이하기에 달은 가장 오래된 TV*
오므렸다 폈다로 늑대를 데리고 와요 그림자 사이로 푸른 울음도 끼워 넣고 천천히 지평선에서 멀어지는 시간 멀다는 것은 어둠 알고 보면 어둠과 빛 먼 오른쪽으로 늑대가 빠져나가는 문
인디언남자는 프록스 다발을 안고 핑크문을 기다리고 있죠 늑대도 울음을 멈칫했어요 그림자를 깨뜨릴 수 있을까요 오늘은 어느 때보다 손이 더 가벼워져야 해요
화성의 기상 주의보는 온통 분홍, 분홍이었고요 스페이스닷컴에서는 "이번 Pink Moon이 평소보다 더 큰 슈퍼문 이 될 거"라고 했어요
'백남준 비디오작품명 * 달은 가장 오래된 TV 변용
-시집 『2퍼센트의 동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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