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청륭 시인 / 오른편을 위하여
입동 새벽부터 기온이 내려가고 바람이 불었다 눈 먼 나귀가 목에 연자방아를 메고 종일 돌고 돌아 끝없이 돌고 있다 바깥엔 계속 흙먼지가 날리고 귀리의 북대기도 날렸다 왼편 안쪽 발굽이 더 닳은 나귀가 기웃둥거린다 노을에 젖은 마을도 조금씩 기울고 있다
박청륭 시인 / 타지마할
오랫동안 머물었던 해가 기울기 시작한다. 평원 끝없이 적시고 있는 노을은 핏빛이다.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분홍 어깨를 들어낸 타지마할 영묘, 밤이 되어서도 지워지지 않는 지평선이 있다.
박청륭 시인 / 카이로 묘지 마을 소년
엔진 오일 밋숑 오일 브레이크 오일 오일 오일 하루 종일 폐유만 만지는 기름투성이의 낫셀군은 반질반질 부랄까지 새까맣다. 자동차 정비업소 서비스 센터에 들어 온지도 3년 학교 교실 의자에 앉아 공부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한 번도 빨아본 적이 없는 13살짜리 소년의 옷은 이미 옷이 아니다. 집에 와서도 갈아입을 옷이 없다. 3마장이 넘는 길을 매일 걸어서 출퇴근한다. 기술을 배울 동안 월급이라곤 한 푼도 없다. 그런 소년은 낫셀군만이 아니다. 카이로 외곽 묘지 마을 아니 이젠 인구 30만의 전기와 수도, 가스까지 공급되는 도시가 되었다. 한두 사람의 묘지 도굴꾼에서 시작한 먼 선조에서 가까운 선조까지 선조들의 뼈만 파먹고 사는 이들 마을의 집들은 흙벽돌 토담 위에 대추야자 잎을 덮은 게 고작이다. 도시 너머 먼 사막에 아니 사막 너머 먼 도시에 붉게 노을이 지고 어두워지는 저녁 이미 대낮부터 켜진 가로등이 엷어진다. 더욱 엷어진 하늘 가득 흙먼지가 끼어 있다.
박청륭 시인 / 키질 야행(夜行)
며칠을 굶은 늑대들이 입도 때지 못하는 강추위. 등불인지 별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 불빛 하나가 사라지고 황야는 더욱 어두워진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다 헤어진 검은 망토를 걸친 백발의 모차르트가 아직도 팽팽한 활을 짚고 섰다. 첩첩이 묻힌 산 주름 속에 쿠마라지바(鳩摩羅汁)의 타지 않는 혓바닥* 석굴 키질 사원은 아득하기만 하다. 가로 질러가는 유성에 놀란 벙어리 들개가 앓는 소리를 낸다. 여기저기 죽은 것들의 청금석(靑金石) 짙푸른 뼈가 빛을 내고 있다.
*舌不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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