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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수진 시인 / 따뜻한 얼음 외 1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8.

권수진 시인 / 따뜻한 얼음

 

 

맑고 투명한 물속으로

누나의 사랑이 풍덩, 빠졌어

5월이라고 했어

첫사랑이 강바닥에 제 몸 드러내기까지

정처 없는 물살처럼 청춘은 흘러갔어

누나는 피를 얼려 사각얼음 만들었어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사랑 아니었으므로

잡으려면 서로에게 차가운 상처만 주는

얼음이 될 수밖에 없었어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온을 되찾았다고 했어

강 하류의 넓은 폭만큼이나 멀어져버린 거리(距離)

누나는 적당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어

무엇 하나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누나는 5월의 신부가 되었어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누나의 안부는

냉장고 속에 오래 얼음으로 덮여 있었어

저것 봐, 누나의 안경에 서리가 내렸어

누군가 입김 때문이라고 했지만

결빙이 시작된 불안한 살얼음판을 당당하게 걸었던

그때의 발자국 소리 들었어

차가운 왼손에 깍지 낀

오른 손목을 떼어놓지 못했던

온몸에 소름이 돋는 소금바람이 불었어

맞잡은 손처럼 더욱 단단해졌던 그런 얼음을

나는 따뜻한 얼음으로 기록했어.

 

 


 

 

권수진 시인 / 괭이바다*

 

 

마산만 앞바다에 둥둥 떠 있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어리 떼죽음을 바라본다

죽음이 밀려온 자리에는

악취를 풍기며 사람들이 아우성치는데

70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

한반도 어느 지역보다 따뜻하고 평온했던

마산합포구 구산면 심리 산 24-1번지

이곳은 민족 반역자 따위에 관용을 베풀 수 없는 수몰현장

육군 특무대에 연행된 사람들이

무릎 꿇고, 눈을 가리고, 손발이 묶인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쓸쓸한 바다

지정된 장소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헌병대를 향해서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수감자들의 울부짖는 목소리 메아리친다

영문도 모른 채 바다로 끌려와서

활어처럼 파닥파닥 몸부림치는 지느러미

천천히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런 날이면 야삼경 남 다 자는 고요한 밤

해안선 따라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고양이 구슬픈 울음처럼 귓가를 맴도는데

오래전부터 청정해역으로 소문 난 괭이 앞바다

언제부턴가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해안가로 떠밀려오기 시작하고

고깃배 지나간 자리마다 생채기를 남긴 채

역사의 뒤란으로 황량한 바람만 분다

 

*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된 수감자들을 수장시킨 장소

 

 


 

권수진 시인

1977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 경남대학교 철학과 졸업. 청년작가 아카데미 1기 수료. 제6회 지리산 문학제 최치원 신인문학상 등단. 2011년 계간 《시작》 가을호로 등단.  시집으로 『철학적인 하루』(시산맥사, 2015)가 있음. 공저 『시골시인-K』. 제8회 한국농촌문학상 대상, 제15회 토지문학제 하동 소재 작품상, 제4회 순암 안정복문학상 대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