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선 시인 / 아내의 마술
아내가 슬프고 슬픈 아내를 보고 있는 내가 슬프고 그때 온 장모님 전화 받으며, 그러엄 우린 잘 지내지, 하는 아내 속의 아내는 더 슬프다
마술처럼 완벽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모자에서 나온 토끼가 모자 속으로 자청해서 돌아간다 내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 하면 딱딱한 면은 왜 나를 막는가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직업이 아비를 버리고 병이 아픈 자를 버리고 마술사도 결국 토끼를 버리고
매정한 집이, 너 나가, 하며 문밖에 길을 쏟아버리자 미망이 그 길을 받아 품에 한 번 꼭 안았다가 바로 버린다
온 세상을 슬픔으로 물들게 하려고 우는 아내가 식탁 모서리를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마술이다
심보선 시인 / 이 별의 일
너와의 이별은 도무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 그다음에 이별하자 어디쯤 왔는가, 멸망이여
심보선 시인 / 형
형은 어쩌면 신부님이 됐을 거야. 오늘 어느 신부님을 만났는데 형 생각이 났어. 나이가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나한테 자율성이랑 타율성 외에도 신율성이라는 게 있다고 가르쳐줬어.
신의 계율에 따라 사는 거래.
나는 시율성이라는 것도 있다고 말해줬어. 시의 운율에 따라 사는 거라고. 신부님이 내 말에 웃었어. 웃는 모습이 꼭 형 같았어.
형은 분명 선량한 사람이 됐을 거야. 나만큼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을 테고 나보다 어머니를 잘 위로해줬을 거야. 당연히 식구들 중에 맨 마지막으로 잠들었겠지. 문들을 다 닫고. 불들을 다 끄고.
형한테는 뭐든 다 고백했을 거야.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사는 게 너무나 무섭다고. 죽고 싶다고. 사실 형이 우리 중에 제일 슬펐을 텐데.
그래도 형은 시인은 안 됐을 거야.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게 시니까 말이야.
이것 봐, 지금 나는 형을 떠올리며 시를 쓰고 있잖아. 그런데 형이 이 시를 봤다면 뭐라고 할까? 너무 감상적이라고 할까? 질문이 지나치게 많다고 할까? 아마도 그냥 말없이 웃었겠지. 아까 그 신부님처럼.
시가 아니더라도 난 자주 형을 생각해. 형이 읽지 않았던 책들을 읽고 형이 가지 않았던 곳들을 가고 형이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고 형이 하지 않았던 사랑을 해.
형 몫까지 산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끔 내가 나보다 두 살 더 늙은 것처럼 느껴져.
그럼 죽을 땐 두 해 빨리 죽는 거라고 느낄까? 아니면 두 해 늦게 죽는 거라고 느낄까? 그건 그때가 돼봐야 알겠지.
그런데 형은 정말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사실 모르는 일이지. 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가지 않았으리란 법도 없지. 불행이라는 건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까 말야.
만약 그랬다면 내가 형보다 더 슬픈 사람이 되고 형은 감옥에서 시를 썼을까? 그것도 그때가 돼봐야 알겠지.
형한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수두룩했는데 결국 하나도 물어보지 못했네.
형 때문에 나는 혼자 너무 많은 생각에 빠지는 사람이 됐어. 이것 봐. 지금 나는 새벽까지 잠도 안 자고 시를 쓰고 있잖아. 문들도 다 열어두고. 불들도 다 켜놓고.
형, 정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왜 형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야? 왜 형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았던 거야? 왜 나는 슬플 때마다 둘째가 되는 거야? 형,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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