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향 시인 / 봄의 내부 검은 그림자 거실 바닥을 화들짝 지나갔다 새 떼가 스쳐 간 것일까 구름이 날아간 것일까 타고 남은 햇살 자국이 내 의식을 스치고 지났을까 검은 얼룩의 잔상이 멍하니 티브이에 빠져있던 오후를 흔들었다 흐린 잔상을 따라 까마귀 떼 울음이 흩어지고 날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희고 붉었던 꽃잎들 영혼이 다 날아간 것처럼 봄날의 내부는 텅 비어 있다 창밖을 내려 다 보았을 때 사월의 새순들이 하늘 바깥쪽으로 가득 뻗쳐오른다
조연향 시인 / 자가격리 중
저 땅에는 발을 들여놓지 말았어야 했었어
혹독하지만 너와 나, 우리 사랑이 물그림자처럼 깊어지는 계절......
조연향 시인 / 국경을 지나며
해가지지 않아도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숲을 적시며 하류까지 떠내려오는 저녁의 호수 완장을 찬 여승무원들 일제히 창문 커튼을 내릴 때 열차는 접경 지역에서 멈칫거린다 기어코 새어드는 노을빛 바퀴는 여전히 교전 지역을 지나고 있다 조금 후 경계가 없는 초원에 닿을 수 있을까 망명의 꿈이 이루어질까 국경과 국경 사이 마약밀매 신호처럼 독수리 떼 웅성거리며 날아오르고 강기슭 부딪치며 탈주 소식을 교신하는 새떼들 우리는 결코 포로가 아니다 눅눅한 책갈피처럼 날개를 푸덕거려 본다 횡단 열차 꼬리에서 뜨겁게 숨 쉬는 행성들이여 우리는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떠도는 것이다 해가 지면서 달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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