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 시인 / 잊거나 잊히거나
코요테 한마리 독약 먹고 죽은 쥐를 삼켰죠 숨 끊어지기 전에 도끼로 꼬리를 내려치세요 뼈와 살이 잘리는 것 내장이 타들어가는 것 더 견디기 힘든 건 무엇입니까? 제게도 꼬리의 흔적이 있어요 피거품이 입을 막아 한마디 말 내뱉지 못했죠 손톱 발톱 다 빠지도록 바닥을 긁던 저녁 번갯불 관통하는 아픔으로 덮어야 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누군가는 내 꼬리를 잘라주어야 했고 나도 어떤 이의 꼬리를 모래언덕 깊숙이 묻었답니다 막 도착한 당신, 모래성 속으로 초대합니다 노을과 바람으로 몸을 씻어요 모래 미소와 모래 눈물로 배를 채우고 모래의 테라스로 걸어오세요 떠나간 모든 게 남아 있는 그림자를 안고 춤을 춥니다 잊지 마세요, 다 잊어버리세요 원반 같은 달 아래 엉덩이에 빗자루를 매단 코요테들이 발자국을 쓸어줍니다 스러지고 스러지고 스러질 마을 우리는 잘 마른 해골로 무도회장을 장식합니다 꼬리에 손대지 마세요 이곳의 예의랍니다 코요테 한마리 독약 먹고 죽은 쥐를 삼키면 도끼로 꼬리를 잘라주세요 더 늦기 전에 아주 늦기 전에 그게 우리의 약속이었죠
-시집 <쏘가리, 호랑이> 창비
이정훈 시인 / 사랑이 그랬던 것처럼
사수에게 들었다 — 차가 전복되려 하거나 잭나이프처럼 접힐 땐 트레일러 브레이크를 당기고 가속 페달을 밟아라 한쪽 바퀴가 허공에 뜨자 눈알 굴릴 새도 없었다 — 눈비에 미끄러져 차체가 가드레일에 붙으면 가드레일 쪽으로 핸들 틀어 반동으로 탈출하라 제대로 한 사람들은 이 바닥 떴다 모든, 굉음과 불꽃 듣기는 했으나 본 적 없는 유령들 확실한 한 가지는 뒤집어 놓은 트레일러가 기차만큼 길게 보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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