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 시인 / 길을 위하여
꽃 진 라일락 가지가 드리우는 그늘 아래 앉아 공원 내 음악방송에 귀 기울여 보기도 하며 머언 거리에서 서성거릴 피멍 든 내 삶의 경골의 구둣소리를 듣는다 세상 속 어떠한 절망도 사람을 끝장 낼 수는 없다고 중얼대며 가는 길 위에서 따가운 오월의 햇빛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들고 잠시 바라보면, 등성이로 구름을 몰아가는 바람의 귀엣말 같은 돌돌거림 바윗길 옆, 오두마니 앉아 있는 내 표정에서 얼른 슬픔을 읽어 내지 못한 사람들은 셔츠 앞자락을 펄럭이며 저만치 앞서 가 버리고 백련암 오르는 길 옆, 바위틈마다 촘촘히 박힌 날개이끼들을 밟을 새라 조심하며 나는 또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길고도 먼 길, 나는 이 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피로와 숨가쁨이야말로 이미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기억과 기억 어디쯤과 몸비빔한 내 몸뚱아리에서 부풀어 오른 새로운 힘의 비유일 터, 어스름 설핏 내린 비탈길을 실안개 싸여가는 계곡을 어둠이 묻어나는 풍경소리 그 모두를 지나 또는, 위험의 모든 벼랑 끝을 건너뛰어 이제 우리가 스쳐왔던 곳마다 철쭉꽃이 피고 지고 순식간에 오월의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고 있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위협이 될 수 없는 몸에서 마침내 나를 지우고 나에게 이르는 길 저 등성 너머에서 순결하게 빛나는 길 하나를 위하여 나는 더 이상 추억에 대항하지 않을 것이다.
-시집 『속아가미로 호흡해 보는 사랑』, 전망, 1996.
이수 시인 / 가을생각
가을은 놓아주는 연습을 해야지 별리가 순리이니 꽃들도 잎들도 햇살도 한곳에 멈추지 않아 바람이 곁에 머무르지 않는 것처럼 어제의 강물이 오늘의 강물이 아니니 고이는 것은 썩는 것.
지금 마주서 있는 당신과 나 당신 생각이나 내 생각이 언제까지나 같기를 바라는 것은 삶의 배반이 아닌가 곱게 물든 단풍미인 같은 당신을 살며시 놓아주고 싶어.
내가 너무나 사랑하고 있기에 시들고 썩는 당신 모습 보고 싶지 않아서 돌아서는 당신이 보고파도 가슴 아련히 아련히 저며질지라도 마르지 않은 고운 당신 모습 그대로 오래 간직하고픈 생각으로 놓아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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