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태숙 시인 / 수태고지
너를 기다리다 문득 한 소식 받으니 너는 몇 겹 하늘 위 공허를 다 데리고 네게서 소멸된 모든 빛을 다 데리고 죄 받듯 온단다 벌 받듯 온단다 간 밤 계면조 비탄조로 서럽게 울던 소름 돋게 지르던 귀성에 실려 세세생생 풀지 못할 원한 보듬고 잊어도 잊히지 않는 노여움 살뜰히 한탄하듯 구름 너울너울 억장너머 뭉게뭉게 복 지으러 온단다 몸 지으러 온단다 큰 기쁨을 뒤로하고 큰 슬픔을 앞세워서 그 슬픔에 거한 영원의 이름으로 영원을 품은 찰나의 인연으로 업 지으러 온단다 업 지우러 온단다 아주 오는 것은 아니게 아주 오지 않는 것도 아니게 너를 기다리다 몇 겁을 다해 너를 기다리다 오늘은 돌덩이에 성령이 깃든다
-월간 2002년 《현대시》 등단시
함태숙 시인 / 쥴리라고 불리는 것들
얼굴을 몇 개나 갈아 끼웠을까 전구소켓처럼 그 곳엔 주름이 많고 나머지는 매끈하다 실리콘으로 주물한 비너스 입가엔 히알루론산 턱볼엔 필러 최소한의 신경망만 남기고 맹독을 쏘고 엎드린 보툴리누스 입을 벌리면 한파가 쏟아지는 계절이 봄을 살해하지 흰 뼈를 깎아서 입출국 기록도 없이 이제 통관의 입법이 끝나면 입술산을 돋우고 화면에 파아란 정맥을 띄워야지 환타지를 실현할수록 무릎걸음으로 세계는 다가오네 자, 포즈를 바꿔 볼까? 일국의 팔다리를 꺾어서 벌어진 팔 안에 싸구려 국경을 구겨서 어쩜 너희들은 이렇게 순수할까? 환각을 완성시킨 뱀들의 청사에서 자궁도 없이 율법을 출산하는 창녀 반은 성녀 전력을 다해 완전체로 일어서는 특상급 리얼돌이 애플의 나무 아래 물 호스를 들고 서 있다 기억해라 인간을 유지하기 위해 그 어떤 수고도 치르지 않겠다는 것을 그러니까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니까 그 보다 더 높은 곳에서 그냥 하나의 절정이라 불러줘 피와 땀과 눈물이 없는 청결하게 소독한 네러티브를 달고 나는 미끄러지네 1년 1년 검증되지 않고 지나 온 그 어느 한 해도 없이 역사를 질질 끌고 왔네 가랑이가 다 분화되지도 않은 보폭을 유지하며 앉았다 일어서면 별들이 이마를 깨트리지 한 조각의 파편을 얻기 위해 다이아가 박힌 해골들이 치마폭에서 우르륵 굴러가는 리얼 리얼 마약 같은 밤의 치골이지 그때 이빨들이 돋아나 말들을 뱉어내는 어떤 돌에서는 혈관이 선연히 비친다 어디서 흘러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붉고 붉은 주입들이 서로를 쌓아 단단한 벽이 되는 밤의 입구에서 거듭거듭 도래하는
시집 『토성에서 생각하기』(시인동네, 2023)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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