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재 시인 / 암묵
문장은 욕망의 한 방향에 놓여 있다고 본다 뭐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쩌면 욕망은, 욕망의 반대를 향해 있는 것 같다고 언뜻 생각하지 않고자 노력한다 사랑을 하고 비켜나고, 사랑을 하고 합리화하고 토론하는 사람들을 보고, 싸우는 사람들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면 나는 어디에도 관여돼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충분하다고 착각하면서, 솔직해진다 솔직하는 말이 얼마나 솔직하지 않은 말인지 생각하면서 생각하지 않아도 생각은 되고 만다 되는 것들에 굳이 관여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은 없다고 또 생각하면서 썼던 문장을 지운다 지운 문장을 다시 쓰고 고친다 고친 문장은 지워진다. 문장에 관여하는 것처럼, 타인을 포함한 나의 욕망에 관여하는 행위마저 불필요하다는 걸
이영재 시인 / 검은 돌의 촉감
묻습니다 살수 없는 실패는 정당합니까 과연, 이 돌은 당위성을 따져볼 것도 없이 이 위치입니다 나의 선택도 돌의 선택도 아닙니다. 돌은 자연스레 자리를 찾아갔을 뿐입니다. 패배가 자연스레 이 위치에 놓여 있던 것처럼 말입니다 자연스레라니, 얼마나 잔인한 말입니까 압니다 실패는 정당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현명한 의자에 앉아 패배보다 실패를 실채보다 실수를 실수보다 검은 돌을 검을 돌보다 흰 돌을 흰 돌보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을 오래 연민합니다 연민을 복기하지는 않습니다 위치는 위치일 뿐이어서 위치를 통해 위나 아래를 가늠하지는 않는 편입니다 변명이지만 변명은 아닙니다
-시집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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