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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윤주 시인 / 풀 외 6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2.

배윤주 시인 / 풀

 

 

잡초는 언제든

 

북받쳐 올라올 준비가 되어 있는 맹수의 발자국

 

무심히 스치는 바람에도

 

터질 듯한 체기를 가지고

 

뇌리에 무수히 새싹을 내는 것이다

 

풀씨의 가벼움으로도 기울어지는 것은 기세 확장술

 

풀잎 위에 앉는 새는 울 시간이 없다

 

나선의 칼날이 파고드는 풀베기에도

 

풀의 향기는 마르지 않는다

 

-시집 『옆으로 누운 말들』 (시산맥, 2022) 수록

 

 


 

 

배윤주 시인 / 바람이 가는 길을 간다

 

 

한가한 고원은 없어

 

내밀한 저음에서 세상의 파란 고음까지

 

벽을 만나면 벽을 넘고

숲을 만나면

숲을 뚫고 가는 거야

 

바위를 흔들며

물에 흔들리며 가는 거야

부딪히며 가는 길에

풀잎 위에서 잠시 멈추어도 괜찮아

 

꽃잎이 지는 속도에도 상처받지 않고

새벽이 오는 고원의 꼭짓점을 향해 가는 거야

 

언젠가 우리에게 헤어질 순간이 온다 해도

잠이 깊어지는 영혼을 깨우며

바람이 가는 길을 가는 거야

 

 


 

 

배윤주 시인 / 잘못 끼워진 단추

 

 

앙다문 입술 열고

 

뱉어내는 말 때문에

 

되돌아 나와야 했다

 

잘못 끼워진 단추는

 

다시 풀어내야 할 관계의 깊이

 

헝클어진 뫼비우스의 띠는 돌고 돌아 되돌아 나오기

곡면의 각도만큼 쉽지 않았다

 

난 그 말이 제일 힘들었어

 

제 자리에 꼭 맞는 첫 단추 마침표로 찍는다

 

 


 

 

배윤주 시인 / 소나기에 젖었다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에요

 

소나기에 젖었다고

되돌아가라 하지 마세요

 

물이 깊은 곳에서 물고기는

날마다 젖어요

젖음을 누리는 물고기처럼 살라 하세요

 

힘과 저항의 간극에도 빗방울이 떨어져요

 

천둥 몇 악장, 번개 몇 포기, 강풍 몇 다발쯤은

거뜬히 뚫고 내려요

 

되돌아갈 수 없다고 해도

소나기 없이 살지는 않을래요

 

다시 되밀리지 않을 섬으로

흠뻑 젖으며 살아갈래요

 

 


 

 

배윤주 시인 / 틈이 소란하다

 

 

추락하는 새의 날개처럼 내밀한

 

틈은 자신을 온전히 보여주어야 열린다

 

너와의 사이에 틈은 어디에나 있고

 

남은 한 꺼풀의 환상까지도 걷어 낸다

 

틈은 작을수록 소란하여

 

날아오를 수 있을 때 빨리 날아올라야 한다

 

우리는 다시 보고 싶어질 것이다

 

 


 

 

배윤주 시인 / 붉은 스위치

 

 

풀 앞에 서서 바람이 소리친다

삭혀내지 못한 생 줄기를 세차게 흔든다

 

바닥이 없는 바닥 깊숙한 곳까지

 

작은 샘 지켜 내려는 잔뿌리 흰빛으로 절절하다

 

바람이 얼마나 더 울부짖어야 풀의 고요한 음성 들을까

 

발등을 내리찧는 뜨거운 아우성이 먼저 들린다

 

덩어리째 갈라지는 흙바닥

 

풀은 다리를 건너가는 중이다

 

죽을힘 다해 붉은 스위치를 켠다

 

 


 

 

배윤주 시인 / 백합白蛤의 수신호

 

 

세월의 더께만큼 단단해진 침묵이 수족관 속에 누워 있다

 

달려드는 물 팔매질 속에 새겨진 조개의 무늬들

 

조개껍데기 속에서 물의 틈을 밀며 촉수를 내민다

 

너는 누구에게 젖은 손 내미는가

 

촛불은 녹아내리는데

 

뜨겁게 타는 마음을 언제 휘날리려 하는가

 

뼛속도 보이지 않는 낯선 병명으로 지은 거리두기

 

생존을 위해 손잡을 수 없는 거리에서

 

입 닫고 눈 감은 단절과 마주해 버렸다

 

우리는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속살거리는 혓바닥 입속에 숨기고

 

식어가는 일상의 만남에는 곰팡이가 피고

 

모서리뿐인 은신처에는 출구조차 보이지 않는다

 

위로가 절박해지는 우리는 누구에게 손 내미는가

 

온몸으로 손잡아 주는 물의 포옹에

 

백합은 어떤 수신호를 보내는 것일까

 

-시집 <옆으로 누운 말들>에서

 

 


 

배윤주 시인

충북 영동에서 출생. 경인교육대학 및 한국교원대학 교육대학원 졸업. 2019년 《시와 경계》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2022년 시집 『옆으로 누운 말들』 출간. 현재 『시와경계』 회원, 『시산맥』 회원, 『현대시학』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