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복 시인 / 들쥐의 내력
바람 쏠린 흙담 구멍 사이로 수숫대가 허연 뼈를 드러냈다
비스듬히 기울어가는 흙벽에서 헐어내린 진흙 말라 쌓이고 암팡진 개미 부지런히 굴을 팠다
통나무 파내어 기둥에 걸고 몇 대를 내려 누렁소 살찌웠을 여물통에는 비름풀이 홀로 웃자랐다
익모초 푸른 향기 그윽한 뒤안에 살구 제풀에 익어 떨어지도록 매미는 한낮을 울고 사뭇 인기척이 그리운 집쥐는 막무가내 들쥐가 되어갔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아서 흙담에서 내몰린 생들이 대도시 변두리 산동네 콘크리트 벽을 치고 오르며 시리고 애달프게, 들쥐처럼 산다
정기복 시인 / 서울에서의 첫눈
겨울을 앞질러 온 눈발이 쌓이지 못하고 도시 한귀퉁이를 서성대다가는 서둘러 진창을 놓았다 강화행 막차가 끊긴 신촌로터리 한쪽 담에 기댄 포장마차가 귀가를 놓친 승객 몇을 앉히고 꼼장어를 구웠다 쌓이지 못하는 게 눈만의 아픔이 아니란 걸 모두들 소주잔으로 확인하듯 이따금씩 고개를 젖혔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이 도도한 기형의 도시와 자본 내게 슬픔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술을 끊을 수 있을까 겨울을 앞질러 막차는 가고 깨어진 안경이며 벗겨진 구두며, 신분증을 떠나보낸 취기가 첫눈 맞으며 나를 재웠다
-시집 <어떤 청혼>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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