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덕기 시인 / 봄으로 가는 지도
언덕에 늘어선 옹이 박힌 겨울나무 빛을 향한 끝없는 구애가 그늘진 시간마다 허공에 손을 뻗는다
추위에 시달린 두꺼운 각질 갈라진 피부를 봉합도 못한 채 살이 에이는 고통을 속으로 삭인다
해묵은 잎과 삭정이 땅에 떨군 채 맨몸으로 혹한을 건너는 나무들
봄을 찾아가는 비밀지도 한 장씩 꼭 쥐고 있다
시집 『 봄으로 가는 지도 』 2022. 지혜
임덕기 시인 / 풀의 영유권
길가 보도블록 틈새로 풀들이 왁자하다
쇠비름, 질경이, 민들레, 강아지풀… 발뒤꿈치에 잔뜩 힘주고 서 있다
본래 이곳은 들판이었다 풀들이 주인이었을 때는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길이 생긴다는 말에 영유권 한번 내세우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뿌리째 뽑힌 잡초들
그 자리에 각진 보도블록이 촘촘히 심어졌다 풀들의 땅이 사라졌다
봄비가 스쳐가고 어미가 흘린 씨앗들이 억척스레 이름을 내밀었다 한 줌 틈새가 노랗게 피었다
지나는 발길에 밟혀도 자손을 퍼트리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봄볕을 이고 식구를 늘려간다
-시집 『 봄으로 가는 지도 』 2022. 지혜
임덕기 시인 / 흔들리면 무너지지 않는다
말귀를 닮은 산, 산사에는 태풍에도 살아남은 돌탑들이 서 있다
돌을 쌓아올릴 때 돌탑이 완성되었을 때 반드시 해야할 일은 흔들어보는 일이다
돌틈에 끼어있는 작은 버팀돌 돌탑이 흔들리면 따라서 흔들린다
흔들리면 무너지지 않는다
그동안 흔들리지 못했던 젊은이들 흔들리지 않고 살았던 이들 바람을 만나 맥없이 무너졌다고 아침 신문에 커다란 활자로 떠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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