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영 시인 / 수요일 아이
수요일 아이하고 친구가 되었어 조금만 기다리면 수요일 아이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면서 나를 찾아올거야 수요일 아이는 일주일에 한 번씩 동굴에서 달빛을 꺼내지 보랏빛 안개를 배낭에 담기도 하고 알록달록 솥에 넣어 끓이기도 해 수요일 아이는 보글보글 대답했어 알맞게 졸아들 때까지 새콤달콤 썰어주면 된다고 주황색 바다와 살구색 하늘 그리고 간질간질한 초록색은 언제나 나만 따라다녀 수요일아이처럼 날마다 수염이 자라진 않지만 자꾸만 짧아지는 수요일 아이
챙겨갔던 비스킷 사과 반쪽이 바닥에 뒹굴었지 부서진 배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생각하는 수요일아이 거울에 비친 엄마도 이젠 곧 집을 비울 거라고 했어 수요일 아이가 알고 있는 건 봉투 속에서 꿈을 꾸는 휴대폰이야 수요일 아이는 팔락팔락 책가방을 챙겼어 스커트가 뜯겨 진 채로 말이야
깔깔 웃어대며 둥글게 둥글게 사라지는 수요일 수요일엔 언제나 비가 내려, 참 이상한 일이야
유승영 시인 / 상큼한 감정
비워내고 털어내고 나는 맨발이다 중심에서부터 돌아나오는 소리 영혼이 담긴 원형 접시가 메마른 나의 계보에 편입되는,
유승영 시인 / 메리 크리스마스
눈이 내립니다 스마트한 도시를 지나 텃밭의 김장배추 위에 현대시가 도착한 우편함 위에 고시텔 쪽방 창문 없는 아이에게 눈이 내립니다
미지근한 난로 위에 소복소복 눈이 내립니다
눈이 내립니다 파르르 떨리는 비닐 같은 심장 위에 알약 하나로 푸욱 잠이 드는 침대 위에 차륵 차륵 눈이 내립니다 발이 닿지 않아 더 멀리 갈 수 없는 흔들그네 위에 몇 년째 키가 크지 않은 오죽 위에 눈이 내립니다 파란 보석처럼 눈이 내립니다
성냥팔이 소녀가 창밖에서 손을 호호 불어댑니다 바다의 눈동자 셈 레이의 목걸이에 눈이 내립니다 너무나 많 가지고 있던 것들 이제는 탈탈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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