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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동민 시인 / 야시장(夜市場) 외 1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1.

박동민 시인 / 야시장(夜市場)

 

 

길 잃은 이들이 한데 모였네 난리 통에 장이 섰네

뿔뿔이 헤어진 이들은 전쟁이 끝나도 같은 악몽을 꾸네

눈썹에 앉아 자리다툼 하던 별들이 하늘로 질끈, 뛰어들었네

피난민들은 풀어진 신발 끈이나 부러진 발톱 같은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찾으려 모퉁이에서 쪽잠을 자네

1일 6일, 2일 7일, 3일 8일, 4일 9일, 5일 10일에 장이 서네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매일매일이 장날이네

그날도 장날이었네 가는 날이 장날이었네

얼굴 전체가 아가리인 쓰나미가 별들을 아귀처럼 한 입에 삼키고

군함이 쓰나미를 타고 몰려와 단숨에 깃발을 꽂은 그날이,

장날이었네 시장이 온통 울음바다가 된 그날로부터

길 잃은 이들은 지구를 떠나 고래 뱃속 같은 우주로 밀려왔다네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인 우주장이 섰네

피난민들은 좌판에서 연명하며 검은 지구를 바라보네

빗방울이 쌓이고 쌓여도 바람 한 자락에 무너지고

눈송이에 눈송이가 덮이고 덮여도 빛 한줄기에 녹아내리네

무한정한 기다림의 덤을 받고도 모두 슬피 우는

상갓집처럼 북적이다가도 저수지처럼 고요한 우주 야시장,

지구상의 주가가 오르내려도 이곳은 요지부동이네

가격표도 못 붙이는 기다림을 사고 파는 이들

지구를 닮은 둥근 생일 케이크처럼 부둥켜안고 울며 기도하네

이 백열전구 같은 벚꽃이 져야 별들이 돌아올 텐데

왕벚나무는 사시사철 시장을 밝히네

팽목(憉木) 숲을 지나온 소금기 가득한 해풍에

행여 꽃잎을 밟을까 이마로 걷는 이들, 잠깐 고개를 드네

이들은 여전히 신발 가게 앞을 지나치지 못하네

 

 


 

 

박동민 시인 / 퍼레이드

 

 

천사는 내 생일마다 천국에서 송편을 빚는다 새처럼 박차고 날아올라 형형색색의 벅찬 세상을 굽어보라고, 하루치의 하늘과 구름의 맛을 선물하는 것이다

 

천사야, 자리를 바꾸어 앉을까

 

가장 살기 좋은 나라를 호텔이라 부르는 아이들에게 놀이동산은 비치호텔 스위트룸이다

천사가 데려간 그들의 공화국에는 중력보다 부력이다

 

천사가 회전목마를 타고 바람의 모퉁이를 돌아 나올 때 아이들은 바람개비가 되고 몇몇은 자잘한 웃음을 터뜨린다 남겨진 인형도 홀로그램처럼 번쩍 일어나 주인을 찾아 복도를 떠돈다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오후 2시부터 이십여 분이 천사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 시간

 

구름에 걸터앉아 한쪽 무릎을 세우고 발톱을 깎던 천사는 무릎 속의 얼굴들을 바라본다 주름 사이사이, 천사가 몰래 낳은 천사에게 젖을 물리는 천사를 버리고 떠난, 누구도 닮지 않았지만 모두를 닮은, 엄마들의 무한의 얼굴

저만치

코끼리 리무진의 지붕을 열고 아이들이 손을 흔든다

 

자리를 바꾸어 앉을까

오늘은 내가 송편을 빚어줄 게 천사야

 

 


 

박동민 시인

1981년 부산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과 졸업. 2017년 <시산맥> 등단. 시집 『극지에서 살다 적도에서 만나』. 현재 인천지방법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