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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숙영 시인​ / 별지화(別枝畵) 외 1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1.

김숙영 시인 / 별지화(別枝畵)

 

 

처마 밑 연꽃이 천년을 산다

진흙 물결도 없는데

한 번 돋아나면 오직 적멸을 향해 움직인다

그러니 꽃은 피고 지는 게 아니라

화려함 뒤에 숨어

나무의 숨결과 함께

천천히 조금씩 흩어지고 있는 거다

처음엔 그저 썩지 않게

다스리는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틈 하나 없이

나무를 껴안고 놓지 않는다

이것은 밀봉이 아니라 밀착

색(色)이 공(空)을 향해 걸어가려는 의지

봉황의 춤이 허공중에 스민다

바람이 색을 민다

풍경 소리가 찰방찰방 헤엄친다

지붕 아래 꽃들이 소리 나는 쪽을 본다

색과 색이 만나 서로의 색을 탐독한다

꽃의 안쪽을 볼 수 있는 안목이 될 때까지

나는 화두 밑을 걷고 또 걷는다

머리 위에 꽃의 말이 내려앉는다

대웅전 안쪽 문수보살이

아무도 모르게 웃을 것만 같다

몸속이 화심(花心)으로 가득 찬 기분

꽃의 마음이란

식물성 부처를 만나는 일이었을까

절 쪽만 바라봐도

날개를 편 단청이 꿈속으로 날아왔다

 

-시집 『별들이 노크해도 난 창문을 열 수 없고』에서

 

 


 

 

김숙영 시인 / 채낚기

 

 

조류의 방향이 따라온 길

지금부터는 어둠의 슬하다

달빛 아래 야광 줄이 주저하지 않고 빛을 끌어모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물로 바쳐진 미끼들

오로지 입술만 공격해야 한다

갈고리의 신호음이 울음으로 번진다

아버지는 여러 날의 불황을 끝낼 거란 다짐을

밑밥으로 던진다

한 개의 낚싯대에 여러 개의 바늘을 걸어두었으니

기다림은 쓸모없다

바닥에 닿자마자 끌어올린다

장갑 속 지문이 다 닳은 손가락

운명선마저 지워져 버린 쩍쩍 갈라진 굳은살

감각이 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물고기가 잡히는 순간 경련이 인다

드디어 이빨이 드러난 갈치의 체표가 반짝인다

해저 밑에서 나풀거리듯 칼춤을 추며 올라온 실루엣

비린 향기를 품은 은백색

아버지가 오랜만에 웃는다

바다의 서사가 발단과 위기를 지나

절정을 향해 치닫는 순간이 다가온다

그러나 만선이 결론은 아니다

자식들 다 성장했으니 바다가 준 만큼만 거둔다

(기)이 손가락이 다 잘려나갈 때까지

물고기를 낚을 것인 게 니들은 걱정 말고 공부만 혀라(기)

그 목소리가 지금도 자식들 심장 속을 헤엄쳐 다닌다

아버지가 낚아 올린 것이 물고기만은 아니라는 듯

 

-시집 『별들이 노크해도 난 창문을 열 수 없고』에서

 

 


 

김숙영 시인

2019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 등단. 시집 『별들이 노크해도 난 창문을 열 수 없고』(더푸른출판, 2023) 출판. 2021년 바다문학상 대상, 2022년 천태문학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