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준현 시인 / 나를 깍는 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1.

김준현 시인 / 나를 깍는 너

 

 

연필 끝이 둥글둥글 순해지면서

먹구름처럼 흐리멍덩해지고

살이 찌고

둔해지는 글씨들

 

요즘 내가 쓰는 글이 힘이 없다며

좀 갈고닦으라며

이젠 너인 줄도 못 알아보겠다며

 

너는 연필깍이에 내 연필을 집어놓고 빙빙 돌렸다

 

나는 사람이 자꾸 날카로워지는 게 싫다

 

연필이 얼마나 날카로워질지 모르면서

연필이 닿은 종이가 얼마나 아파할지 모르면서

내가 조금씩 사라져 가는 줄도 모르면서

너는 나를 자꾸만 깍고 깍았다

 

-시집 『세상이 연해질 때까지 비가 왔으면 좋겠어』

 

 


 

 

<동시>

김준현 시인 / 도

 

 

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리코더로 들어가 소리가 되었어

 

두더지 땅굴 속에서 어둠이 빛을 찾아 나가듯

 

열 손가락으로 ㅇ 같은 구멍들 하나하나 막을수록

도, 시, 라, 솔, 파, 미, 레,

 

키가 줄어들어도

빛이 들어오는 모든 구멍이 막혀 있어도

끝에는 언제나 도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슬퍼도

괜찮아 그래도

 

막다른 곳에서도

힘을 내는 도가 있어

아직도

 

 


 

 

김준현 시인 / 자막과 입을 맞추는 영혼

 

 

          그리워 내게 다가올 너를 얼굴도 없는 그대

          그리워 나를 감아 막연한 나를 감아.

          불안한 나를 감아 막연한 나를 감아 너무 그리워

           - 이소라, 「쓸쓸」

 

 

 듣는데 이 부분이 좋았다

 영혼을 옮기고 싶었다

 

 지하도에 얻은 작업실에서 불을 있는 대로 다 켜 놓고 이어폰으로 들었다

 사람들의 발소리가 이소라의 목소리와 함께 울려 퍼졌다

 원래는 '사과상자 속 염색 병아리'라는 글씨로부터 슬프고 깊고 축축한 눈빛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립지 않은데 그리워, 그리워 자꾸만 노래가 강조하는 게 내 마음이 되었다

 음악의 요절은 늘 듣는 사람의 몫이요

 통화 중에는 나도 모를 선들이 휘어지고 꺾이고 헝클어지는 현악기가 되었다

 떨림을 잃을 때만 보이는 것들이

 가끔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럴 때는 막연한, 날 감아, 그리워, 불안한, 말도 없고, 생각도 없고

 음악과 함께하는 세계는 고구마처럼 어둠을 견디다가 생긴 하나의 몸짓이 되어 빛에 의해 밝혀지는 일 이게 너의 사주팔자다

 먹히는 일, 흙 밖에서는 날 감을 게 하나도 없어 어둠이 없어

 흙 밖의 콩은 쭈글쭈글 애늙은이 노화

 

 지하도에 트로트가 다 울리게 틀어 놓고 걷는 사람이 있다 그 트로트가 이소라의 감정과 융화될 수 있을까? 지나가기를 멀어지기를 어서 제 갈 길을 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몰라, 너 역시

 전화로 연결될 수 없는 죽음의 영역에서

 트로트도 오케스트라도 이소라도 누벨바그도 달력 속의 붉은 글씨도 없는 데서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이라는 여성의 목소리처럼 차분해져 버렸는지 몰라

 

 이어폰을 빼자

 풍경이 내게로 밀려들었다

 

-시집 『자막과 입을 맞추는 영혼』 중에서

 

 


 

김준현 시인

1987년 경북 포항에서 출생. 평론가.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영남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수료.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되어 등단. 2020.10.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평론 부문 수상. 시집 『흰 글씨로 쓰는 것』 동시집 『나는 법』.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