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현 시인 / 나를 깍는 너
연필 끝이 둥글둥글 순해지면서 먹구름처럼 흐리멍덩해지고 살이 찌고 둔해지는 글씨들
요즘 내가 쓰는 글이 힘이 없다며 좀 갈고닦으라며 이젠 너인 줄도 못 알아보겠다며
너는 연필깍이에 내 연필을 집어놓고 빙빙 돌렸다
나는 사람이 자꾸 날카로워지는 게 싫다
연필이 얼마나 날카로워질지 모르면서 연필이 닿은 종이가 얼마나 아파할지 모르면서 내가 조금씩 사라져 가는 줄도 모르면서 너는 나를 자꾸만 깍고 깍았다
-시집 『세상이 연해질 때까지 비가 왔으면 좋겠어』
<동시> 김준현 시인 / 도
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리코더로 들어가 소리가 되었어
두더지 땅굴 속에서 어둠이 빛을 찾아 나가듯
열 손가락으로 ㅇ 같은 구멍들 하나하나 막을수록 도, 시, 라, 솔, 파, 미, 레, 도
키가 줄어들어도 빛이 들어오는 모든 구멍이 막혀 있어도 끝에는 언제나 도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슬퍼도 괜찮아 그래도
막다른 곳에서도 힘을 내는 도가 있어 아직도
김준현 시인 / 자막과 입을 맞추는 영혼
그리워 내게 다가올 너를 얼굴도 없는 그대 그리워 나를 감아 막연한 나를 감아. 불안한 나를 감아 막연한 나를 감아 너무 그리워 - 이소라, 「쓸쓸」
듣는데 이 부분이 좋았다 영혼을 옮기고 싶었다
지하도에 얻은 작업실에서 불을 있는 대로 다 켜 놓고 이어폰으로 들었다 사람들의 발소리가 이소라의 목소리와 함께 울려 퍼졌다 원래는 '사과상자 속 염색 병아리'라는 글씨로부터 슬프고 깊고 축축한 눈빛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립지 않은데 그리워, 그리워 자꾸만 노래가 강조하는 게 내 마음이 되었다 음악의 요절은 늘 듣는 사람의 몫이요 통화 중에는 나도 모를 선들이 휘어지고 꺾이고 헝클어지는 현악기가 되었다 떨림을 잃을 때만 보이는 것들이 가끔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럴 때는 막연한, 날 감아, 그리워, 불안한, 말도 없고, 생각도 없고 음악과 함께하는 세계는 고구마처럼 어둠을 견디다가 생긴 하나의 몸짓이 되어 빛에 의해 밝혀지는 일 이게 너의 사주팔자다 먹히는 일, 흙 밖에서는 날 감을 게 하나도 없어 어둠이 없어 흙 밖의 콩은 쭈글쭈글 애늙은이 노화
지하도에 트로트가 다 울리게 틀어 놓고 걷는 사람이 있다 그 트로트가 이소라의 감정과 융화될 수 있을까? 지나가기를 멀어지기를 어서 제 갈 길을 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몰라, 너 역시 전화로 연결될 수 없는 죽음의 영역에서 트로트도 오케스트라도 이소라도 누벨바그도 달력 속의 붉은 글씨도 없는 데서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이라는 여성의 목소리처럼 차분해져 버렸는지 몰라
이어폰을 빼자 풍경이 내게로 밀려들었다
-시집 『자막과 입을 맞추는 영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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