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수 시인 / 영혼의 요실금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 안의 가짜 사내를 흘려버리는 일 남자 화장실 소변기 위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같은 잠언이 만들어낸 가짜 괄약근을 풀어버리는 일 트럭에서 쏟아진 물건들을 묵묵히 치워주고 사라지는 사람들을 뉴스에서 보다가 비로소 남자가 아닌, 사람이 되어 감정을 내려버리는 일 드라마의 별것도 아닌 장면에 문득, 금메달 시상식 휘날리는 국기에도 눈물을 훔치는 일 같이 보던 아내가 못 본 척 웃는 것도 조금 덜 부끄러워하는 일
이제야 저 먼 빙하기 저 깊은 곳에서 꽁꽁 언 사내가 풀려 스치는 햇살에도 사소한 인정에도 찔끔찔끔 새어 나오는 영혼의 요실금
-〈웹진 시산맥〉
박현수 시인 / 주전자
교실 한가운데서 톱밥난로 위에서 뚜껑을 들썩이며 뛰쳐나가고 싶어 하던 마음들 끓어 넘치려 할 때마다 푸, 푸, 한숨으로 타들어가던 격정(激情)들
조금만 건들어도 움푹움푹 상처가 나던 젊은 날들
박현수 시인 / 벽시계가 떠난 자리
벽시계를 벽에서 떼어놓았는데도 눈이 자꾸 벽으로 간다
벽시계가 풀어놓았던 째깍거림의 위치만 여기 어디쯤이란 듯
시간은 그을음만 남기고 못 자리는 주사바늘 자국처럼 남아 있다
벽은 한동안 환상통을 앓는다
벽시계에서 시계를 떼어내어도 눈은 아픈 데로 가는 것이다
-시집 『사물에 말 건네기』, 울력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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