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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현수 시인 / 영혼의 요실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0.

박현수 시인 / 영혼의 요실금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 안의 가짜 사내를 흘려버리는 일

남자 화장실 소변기 위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같은 잠언이 만들어낸

가짜 괄약근을 풀어버리는 일

트럭에서 쏟아진 물건들을

묵묵히 치워주고 사라지는 사람들을

뉴스에서 보다가

비로소 남자가 아닌,

사람이 되어 감정을 내려버리는 일

드라마의 별것도 아닌 장면에 문득,

금메달 시상식

휘날리는 국기에도 눈물을 훔치는 일

같이 보던 아내가 못 본 척

웃는 것도 조금 덜 부끄러워하는 일

 

이제야 저 먼 빙하기

저 깊은 곳에서 꽁꽁 언 사내가 풀려

스치는 햇살에도

사소한 인정에도

찔끔찔끔 새어 나오는 영혼의 요실금

 

-〈웹진 시산맥〉

 

 


 

 

박현수 시인 / 주전자

 

 

교실 한가운데서

톱밥난로 위에서

뚜껑을 들썩이며

뛰쳐나가고 싶어 하던 마음들

끓어 넘치려 할 때마다

푸, 푸,

한숨으로 타들어가던

격정(激情)들

 

조금만 건들어도

움푹움푹

상처가 나던 젊은 날들

 

 


 

 

박현수 시인 / 벽시계가 떠난 자리

 

 

벽시계를

벽에서 떼어놓았는데도

눈이 자꾸 벽으로 간다

 

벽시계가

풀어놓았던 째깍거림의 위치만

여기 어디쯤이란 듯

 

시간은

그을음만 남기고

못 자리는

주사바늘 자국처럼 남아 있다

 

벽은 한동안

환상통을 앓는다

 

벽시계에서

시계를 떼어내어도

눈은 아픈 데로 가는 것이다

 

-시집 『사물에 말 건네기』, 울력 2020

 

 


 

박현수 시인

1966년 경북 봉화에서 출생. 세종대 국문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 박사과정 졸업. 199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 『위험한 독서』 『겨울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사물에 말 건네기』가 있음. 2007년 제39회 한국시협회상 '젊은 시인상'을 수상. 현재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