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호 시인 / 입동, 흐리고 비
싸늘하게 식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의 일관성과 이중성 사이를 헤매던 길이 젖는다 너는 비를 타고 온다
안개와 미세먼지의 침침한 눈, 잿빛 코트를 걸치고 낙엽송 단풍이 계절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다
가랑잎 뒹구는 사연이 젖는다, 텅 빈 정거장 메마른 입술에 입 맞추는 빗줄기 제 몸에 켜켜이 쌓인 우수를 기울여 입동을 크로키하고 있다
꺼트릴 수 없는 불씨 하나 품은 내 가슴이 젖는다 겨울이 온몸으로 번져온다
김은호 시인 / 제라늄 꽃이 피었습니다
어머니는 꽃밭이었습니다 온몸의 뼈가 흔들렸어도 꽃에 기대어 낡고 좁은 서울을 견디셨습니다 이 빠진 보도블록과 백화점 화장실 바닥이, 버스 운전기사의 난폭운전이 어머니를 넘어뜨렸지만 제라늄 꽃은 친절하고 상냥했습니다 6ㆍ25 피난길도 어쩌지 못했던, 남편과 자식들의 바닥에도 미끄러져 본 적 없는 어머니는 꽃피우기를 멈추지 않는 빨간 제라늄이었습니다 ㅡ이렇게 꺾어 심고 물만 주면 꽃이 핀단다 어머니가 주신 제라늄 가지를 화분에 심었습니다 부러진 어머니 뼈도 함께 심었습니다 슬쩍 잎을 스치기만 해도 파스냄새가 났습니다 꽃과 통증을 오래 오가시던 어머니, 지금 화분에서 수줍게 웃고 계십니다
ㅡ시집 <슈나우저를 읽다> 중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정현 시인 / 하마터면 외 1편 (0) | 2023.05.11 |
---|---|
박현수 시인 / 영혼의 요실금 외 2편 (0) | 2023.05.10 |
송준영 시인 / 고향 외 4편 (0) | 2023.05.10 |
이선이 시인 / 네일 아트 외 3편 (0) | 2023.05.10 |
이승리 시인 / 유품 편지 외 1편 (0) | 2023.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