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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승리 시인 / 유품 편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0.

이승리 시인 / 유품 편지

 

 

효자손의 엄지와 검지가 부러져 있다

 

잘못 내린 버스 정류장처럼

장의사 간판만 빼곡한 길 건너편 골목

신비주의 요양원

 

잠금장치 문 앞에 서서

전화 호출 버튼을 누른다

 

ㅡ누구세요?

ㅡ알선자입니다

 

할머니가 남겨놓고 간 효자손을 벗긴다

 

갈퀴에 돋보기안경 닦는 천을 씌워

휜 곳과 아래를 고무줄로 꽉 묶은 채

대패삼겹살 같은 등을 살살 문질러 온

 

나무 빗발이 내리칠 적마다

힘줄 움켜쥔 지팡이의 말엽

 

부러진 엄지 밑에 내 이름이 적혀 있고

부러진 검지 밑에는 장손이라 적힌.

 

 


 

 

이승리 시인 / 패

 

 

노름 속에 싸여 쟁여둔 돈이 흩날릴 즈음

21인치 티브이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급한 대로 라디오를 가져온 아버지는

머리맡에 에프엠을 켜둔 채 잠들었다

나는 맥 빠진 테이프 덮개를 꽉 눌러보고

쭉 당겨보다 발치하듯 부러뜨리고 말았다

집어삼키려 자신을 노려보는 두 눈처럼

아버지는 불호령 치며 라디오를 내던졌다

반지하를 날다 선반과 충돌한 클로징 멘트

박살 난 주파수를 재생할 순 없었다

나는 심박수로만 기억할 뿐이었다

그날의 패 위로 시가 쓰이고 있었다

 


 

이승리 시인

1981년 서울 출생. 서울신학교 신학과 졸업. 2011년 《문학과 의식》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