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영 시인 / 고향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본당 위쪽, 오대산에 머물던 중들의 부도가 밭을 이룹니다 부도는 종 모양입니다 아마 바위같이 앉아 고요에 들거나, 종이나 목탁을 많이 때린 스님들이 사후에 돌종이 될 겁니다 천년 돌 종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눈 푸른 나그네의 귀를 때릴 겁니다 아무리 보아도 크고 웅장한 돌종은 생전 많은 욕심을 먹고 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부도 밭은 시립합창단이 한 300일쯤 고르고 고른 하모니 같아 귀속엔 향불 냄새로 이 오대 골짝을 지핍니다 골짝 전나무 오갈피나무 참나무 자작나무 모두모두 다소곳합니다 심지어는 청설모 다람쥐, 발끝을 간질이는 물소리까지도 그렇지요, 아아 고향입니다 "이 몇 해 만이냐?" "한 40년 만이군" "그래 스님들 법체 강녕들 하십니까? 강녕들" 조그마하고 보잘것없는 돌종이 이끼를 헤집고 나와 쉰 소리로 "그래 돌팔이 놈 풍각쟁이 시인 놈 한500년 만에 고향에 오니 나를 몰라보는군 쯔 쯔" 그랬던 5000년쯤 되어 돌아 돈 고향, 그러나 참말로 참말로 어디에도 접어두고 싶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에겐 고향이 없습니다
송준영 시인 / 깃 없는 바바리
비가 부들부들 기러기 되어 가슴 쓸고 갈잎을 쓸고 가을을 쓸고 가을의 경계를 쓸고 빗물엔 얼비치는 갈빛 사내 맨발로 맨 종아리로 가을을 밟고 가을을 헤집고 갈잎 불며 가슴 속 기러기 되어 오는구나 해가 가고 달이 오고 해와 달 너머로 구름으로 오고 천둥소리 그치더니 아스팔트에 뒹구는 낙엽 위로 비, 빗소리 창을 통해 만져지는 목덜미에 흘러내리는
송준영 시인 / 구두
한 생각이 일어나니 넌 가을이고 한 생각이 스러지니 넌 봄이다 한 생각 일어나니 님의 바람이고 한 생각 스러지니 님에 대한 나의 강물이어라 바람 부는 네거리에 내가 서면 9층 전봇대 뒤로 해가 해가 날아가오 나도 절룩이며 마른하늘을 걸어 넘어 가오 아무 생각 없는 글 한 줄 쓰고 돌아보니 이건 벽보도 낙서도 아니오 다만 구두란 제목은 별난 생각이 없어 달아본 것뿐이오 올 봄도 이렇게 지나갔소 올 가을도 굳바이
송준영 시인 / 임제록
청명한 한 낮 쓸데없이 생사해탈이니 견성성불이니 요따위 것 가르치고 있나? 임제한테 와서 보화는 늘 이렇게 씨부렁거린다
임제에게 제자들이 보화가 도가 있는 중이냐 없는 소냐? 하는데, 보화가 미친놈처럼 나타난다 너가 성현이냐 범부냐? 임제가 묻자 그럼 너가 말해라 내가 성현이냐 범부냐? 임제가 할을 하니 보화가 제자들을 돌아보며 하나는 새 며느리요 하나는 할미군 하는 말끝, 임제가 도적놈! 하고 외치자 도적이라 도적이라 되받아 씨부렁거리며 나간다
보화가 사라진 책갈피엔 가을이 비치는 볕 따슨 한낮!
송준영 시인 / 버스 터미널
광장 후미진 모퉁이의 그을림 나무 하나 서 있다 그 밑, 불빛이 수목화로 나른히 번지는 벤치에 크고 작은 보통이 두어 개 놓여 있다 다가가 보니 작은 보통이에서 손이 슬몃 나와 나를 보고 있다 한쪽에는 뜯다만 알 라면이 큰 보퉁이 위에 그 무게보다 더 무겁게 놓여 있다 하차장에는 장거리를 달려온 지친 버스가 넘어간 해를 등에 업고 들어오고 있다 한 귀퉁이에는 이별해야 할 연인들이 아주 오오래 벽 속에서 나와 같이 갇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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