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규 시인 / 폭설
눈을 가린 너의 팔이 젖어든다 다문 입술 속엔 처음 듣는 이름 들썩이는 창문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우리는 평생 창밖을 알 수가 없는데 너는 왜인지 너를 탓한다
어떤 마음은 아무리 안아도 녹아내리지 않아
눈물은 휴지로 닦는 것이 아니라며, 눈물은 휴지로 닦는 것이 아닌데 나는 자꾸 휴지만 뽑는다
김진규 시인 / 천장이 높은 방
천장이 높은 집에 살아본 적이 없지만 천장이 높은 방을 짓겠다 방을 밝히는 마지막 불이 꺼져갈 때에도 식어버린 마음으로는 다시 갈아 끼울 수 없도록 사람이 드나들어 하늘을 쳐다볼 때에는 새하얀 천장이 저 멀리 아득해지면 좋겠다 환생을 믿던 시절에는 믿음의 크기만큼 무덤이 커졌다지 내 무덤은 아마 더 커질 수 있을 거야 위로, 그리고 위로 실수로 허공에 던졌던 말들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도록 좁은 방을 당신이 있는 곳까지 밀고 가야겠다 아직 닿지 않는 희미한 잔광 뻗은 손이 가끔 저려 오더라도 천장이 높은 방을 짓겠다 그래야겠다 천장이 높지 않다면 내가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가서 홀로 낮아지는 나의 낯선 방 천장을 짓겠다 그래야겠다
김진규 시인 / 처음표
떠나던 꿈은 내게 찾아와 끝없는 곁이 되고 겹겹이 접어둔 소매는 손을 대기도 전에 흘러내렸어
스러지는 물안개도, 서서히 흩어지는 흙더미도 없는 아무도 없는 여행의 마지막 날, 다시금 짐을 챙겨야 하는 날
너는 알까 내가 쓴 모든 쉼표는 너의 말을 생각하며 썼다는 것을 네가 숨을 쉬면 나도 거기에 멈추고, 네가 눈썹을 털어낼 때마다 난 몸서리치며, 하루를 보내고, 이틀이 가면, 약속한 날들은 무색해지고, 쉼표만 자꾸만, 그 시간을 쉬고 있다는 것을
네가 얘기를 시작하면 창밖은 더욱 생생한 바깥이 되어 짙어지는 그늘 속엔 계절이 지나는 소리, 바람 소리, 계속 너를 부르는 소리, 하지만 목을 졸리던 밤처럼, 단단한 돌더미처럼 시퍼런 어부림 속, 자맥질 소리, 수런거리는 소리, 계속 너를 부르는 소리, 하지만 모든 첫사랑은 결국,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통보였듯
잊고 살던 날씨를 챙기고, 오지 않을 추위를 생각하고, 가장 아끼던 표정을 꺼내 드는 순간, 문득 숨이 찬 내가, 아무것도 넣지 못한 짐을 바라보고 있을 때
화분에 심어둔 꽃말이 온통 피던 밤, 아침까지 불이 켜져 있던 방으로 찾아와 무서웠어, 그렇게 말한 건 사실 나였어
그런데, 다시 네가 돌아왔을 때 훔치고 싶던 밤을 지나, 알람도 없이 깨어난 아침 속에서 너는 내가 처음이라 말했다 나는 그게 사랑이라 말했어
-시집 『이곳의 날씨는 우리의 기분』 2021. 여우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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