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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선이 시인 / 네일 아트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0.

이선이 시인 / 네일 아트

 

 

아름다움은

멈출 줄 모르고 돋아나는 살의를 감추는 일이라고

 

죽을 때까지 자라는 줄 알았는데

죽어서도 자란다고

 

칼집에 새긴 연꽃처럼

도마에 심은 나비처럼

 

불멸은

주검에도 화장을 얹는 슬픔이라고

 

 


 

 

이선이 시인 / 순간들

 

 

번호표를 뽑아들고 세상의 호명을 기다려 본 자는 알리라

낯선 운명의 틈바구니에 끼여 울적스런 얼굴로 서면

문득 전신마취에서 깨어나는 얼얼함이 있어

창밖에는 봄바람 가을비 몰아치고, 거기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물컹한 비린내 번져난다는 것을

언제나 나만 비껴가는

단 한 번의 낮고 단호한 호명을 기다리는 동안

내 손에 잡힌 무엇보다 확실한 기다림을 잊기도 한다는 것을

 

세월은 망각의 텃밭을 일구며 아이의 엉덩이에 살을 올리고

물오른 젖가슴을 말린 건포도처럼 쪼그라들게 하지만

길은 부어오른 발등 격류에 던져 놓고

내가 도망쳐 나온 이탈의 길목이 어디쯤인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이

끝끝내 기다려야 할 그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으니

 

어쩌면 면박 당하듯 서 있는 이 시간이

어떤 기억으로도 환생하지 못한 무수한 내 전생이거나

오지 않을 단 한 번의 호명을 기다릴 줄 아는

숨죽인 마음의 백만 년이거나

내 가슴에서 빈 기다림의 번호표를 뽑아갔던 단 한사람의

기억되지 못한 일생一生은 아닐는지

 

이렇게 번호표를 뽑아들고 멍하니 서서 바라는 것은

더는 세상에 구걸하지 않는 묵묵한 얼굴로

한 벌의 생을 완성하는 일

부드럽고 따스한 기다림의 안감을 덧대고는

붉고 뜨거운 혀끝에 그대의 이름을 새기는 일은 아닐는지

 

 


 

 

이선이 시인 / 꽃빛의 내력來歷

 

 

꽃빛이 서로 다른 이유가

사랑을 나눈 대상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랑을 아직 몰랐던 탓

춘분 지나

꽃봉오리 아린 패랭이꽃 화분을 사온 뒤

꽃빛의 비밀을 비로소 짐작하게 되었다

 

한쪽으로만 드나들어 심하게 기울어진 문지방에 앉아

누군가를 향해 간절해져 본 사람이라면

꽃빛의 내력을 모른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암술과 수술이 만나는 순간까지

햇빛 달빛이 벙어리 냉가슴 속을 들락거린 사연을

한 마디로 사초史草에 기록할 수는 없는 일

식물의 가계도를 연구하려면 꽃들의 그리움, 그 연애의 풍문에 민감해야 한다는

어느 식물학자의 말을 떠올려 보면

내 귀가 꽃빛에 달구어지는 이유도 짐작할 만한데

 

어느 밤인가

별빛 다 스러진 새벽까지 꽃을 들여다보느라

풍문으로 쓴 야사野史마저 설핏 잠든 사이

 

패랭이는 꽃 속으로 나를 옮겨 심고 있었던 걸까

꽃은 그렇게 나를 들여다보느라

밤새 다른 꽃빛으로 깨어나고 있었다

 

 


 

 

이선이 시인 / 머그잔에도 얼굴이 있다

 

 

마시던 커피를 반쯤 남겨두고

밋밋한 테이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일하지 않는 시간이 세계를 업어간다

 

비워진 유리창

 

넓은 오후의 이마에 햇빛들 가지런히 번지고

단정한 머그잔에 얼굴이 어른거린다

 

들여다보니, 없는 세계를 구하려고

깨알만한 벌레 한 마리

필사적이다

침묵하는 몸이 내지르는 비명*

 

아무도 구원해주지 않는 세계를 기억하라고

사이렌의 혀가

구월의 이마에 비명을 새겨놓는다

 

커피는 뜨거워지고

얼굴은 차가워지고

 

머그잔 속은 더없이 평화로워

커피는 곤혹이 깊다

 

근처 이슬람사원 쪽으로

유리창은 테이블을 돌려놓는다

 

*알란 쿠르디의 주검을 카메라에 담은 사진기자 닐뉴페르 데미르의 말에서 빌려옴.

 

 


 

이선이 시인

1967년 경남 진양에서 출생. 199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서서 우는 마음』과 평론집 『생명과 서정』 『상상의 열림과 떨림』 등이 있음. 현재 경희대 한국어학과에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