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희 시인 / 사이에는 테이블이
그랬던 것처럼 너는 말하고 나는 망설인다 말없음은 위아래가 없어 위에서 내려다보는 너의 위치를 마주 보는 위치로 바꾼다 분리된 의자가 있고 연결하는 테이블이 있고 계속해봐 갈 데까지 가면 너의 변명이 이해된다 연민이 관계 회복을 주선한다
한때 속삭임은 구설수가 되고 친구, 연인, 부부 그렇다고 남도 아닌 진부해, 그것이 사귀어야 할 운명이고 각자의 위치에서 첫선 보듯 반듯한 자세로 계속할까, 애프터 신청하는 끈질긴 사이에는 나를 의심하는 내가 조성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없는 그 덕에 오늘도 나는 나와 이별하는 중이다
박봉희 시인 / 망향휴게소
그때 그곳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카세트테이프 가게는 태엽 감은 강아지의 입력된 동작을 풀었고 트로트 모창 가수의 구성진 목소리를 흘려보냈고
男과 女, 태풍이 지나간 후 잠잠해졌고 식당 전광판 숫자가 상승기류를 탔고 찜통 육수가 뭉쳐진 우동을 가락가락 풀어냈고 각자 우동과 마주앉았고
男과 女, 남자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고
메슥거리던 女, 토한 후 눈앞이 아득했고 다급히 차를 향해 종종걸음 쳤고 바람에 떠밀려 자신을 망각했고 주유소를 지나 고속도로로 진입했고 문득 고개 돌리니 조수석이 안개에 가려 있었고 男은 부재중이었고 휴게소에 두고 온 男이 누군지 가물가물했고
그때 바람은 연소되었는가
女가 바람에 휩쓸린 서녘의 기억 한 곡을 신청한다 라디오에서 ‘바람 바람 바람’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대, 노래 잘 했었지, 볼륨 높이고 뚝뚝 끊기는 가사 끈질기게 따라 부르는 女, 女를 후진해 그때 그리움을 추적 중이다
망할 놈의 망향, 첫사랑
박봉희 시인 / 바람
창밖을 바라본다
나무를 흔들고 창을 흔들고 나를 흔들고
나무는 흔들리면서 뿌리에 가닿고 창은 흔들리면서 뿌리를 염려하고 나는 흔들리면서 뿌리째 뽑히고
제 위치 동작 심정으로 흔, 들,
1:1의 설탕과 과육 절임 그 끈적거림과 부글거림 그 이후 함초롬히 우러날
엑기스 같은 기억상실증 같은
바람,
나무 창 내가 떠난 후에도 흔들 나무 창 내가 천년만년 흔들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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