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시인 / 모과의 진실
모과아—, 하고 오므렸던 입술을 좍 풀면서 모~오~과~아, 한 번 더 목청 높이면 모예요, 누굴 놀리려고요
내가 아는 한 시인은 모과의 진실, 모과로 익어서 꼭지 똑 떨어진다 아직 덜 익었다 싶으면 천천히
게으르게 후숙後熟, 가을볕 알뜰히 거둬 한겨울의 고독과 강추위를 견디는 모과
모과로서 그가 엮어낸 시집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맨손에 덥석 모과향이 잡힌다
이쪽저쪽 못생긴 모과의 외양이 구석구석 거칠게 뵈는 것은 우락부락 아르 브뤼Art brut 미학의 진면목을 똑바로 설명하기 아주 좋은 기회
꼭 그런 건 아니라고, 누구보다 잘 알지 않느냐고 미소 짓는 뒷모습 쓸쓸해 뵈는 모과
모예요, 정마알~, 남의 얘길 자세히 안 들으시나 봐요 왈칵왈칵 무표정한 비대칭 노란빛 단단히 감싸 쥔 자태가 신령한 종교의식,
샤먼 같다
그 힘으로 모과는 울퉁불퉁 겨울을 건넌다
계간 『미네르바』 2023년 봄호 발표
김영찬 시인 / 아나키스트의 뜰
내일과 모레는, 레일 없는 모래 위에 뜬금없이 펼쳐지는 길 아닌 길
내일모레 우리들은 어떻게 어느 언덕에 기대어 흘러내릴 것인가
레일이 내일로 모레로 모래 위에 아나크로니스틱anachronistic, 시대착오적 무방비상태로
무조건 뭘 하기로 하고 문 열어젖히게 될,
그러니까 우린 여기서 여기
只今에
지금 곧 맨발 딛고 금을 그어 금지선을 뛰어넘는 키 큰 올리브나무를 심어야 한다
웃자란 올리브나무 그늘이 우리를 아나르코 토포필리아anarcho topophilia, 울타리 없앤 아나키스트의 평야에 풀어줄 것이다
계간 『미네르바』 2023년 봄호 발표
김영찬 시인 / 베토벤이 ‘어렵게 내린 결정’*
죽음은 삶보다 쉬운 결정체인가?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쾌속에도 여백의 여지가 빛나듯이 Ludwig von Beethoven ; String Quartet No. 16 F Major Op.135
‘고뇌를 통한 환희에 도달’*하고 싶어 했던 베토벤은 4악장에 “어렵게 내린 결정”이라고 쓴 뒤 덧붙여 적었다
“그래야 하나? Muss es sein?”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Es muss sein. Es muss sein!”
그리고 5개월이 지나자 이 세상에서 떠났다
Muss es sein? 꼭 그래야 하는 거냐고? Es muss sein. Es muss sein! 그래야 한다니까, 그래야지! 자신이 내린 결정에 따라 베토벤은
현악4중주 Op.135 마지막 악절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시베리아를 종단하는 쾌속 열차의 진행 방향으로 첼로가 알레그레토Allegretto로 바이올린에게 캐묻는다 정말 그래야만 하나?
바이올린이 비바체Vivace로 첼로에게 응대한다 아무렴, 그래야지!
붙이지 않아도 될 부제副題까지 달았던 한 시인이 구깃구깃 모래바람에 휩쓸린 사막처럼 미간 찌푸리다가 불쑥
Muss es sein?
제대로 된 질문도 대답도 없이 원고지 밖에서 사라진 시인 그가 택한 결정은 쉬운 것이었나
㈜ *힘들게 내린 결정Der Schwergefasste Entschluss, “Muss es sein”등의 문구와 함께 베토벤이 Op.135 4악장에 표기했던 악상 지시어. *Durch Leiden Freude : 고뇌를 통하여 환희에 도달하다.
계간 『미네르바』 2023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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