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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태우 시인 / 벌3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1.

김태우 시인 / 벌3

-감정기계

 

 

지금은 12시 00분

겨울이 지나간다.

 

서로 마주 앉아 빗소리를 듣는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여름을 기다리고

너는 문밖을 바라보며 가을을 기다린다.

 

너라는 장르에서

가장 예쁜 단어를 골랐다

그게 너였다

 

나는 너의 흔적을 사랑한지 모르겠다.

사랑을 인질로 잡고

슬픈 설렘만 강요했는지도 모르겠다.

 

12시 30분

우리는 예쁜 옷을 입고

절대로 찾지 않을 사진을 찍었다.

 

사랑이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완성되었다.

 

 


 

 

김태우 시인 / 무명배우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주말연속극 시장에서, 미니시리즈 골목에서, 월화드라마 가게에서. 일주일에 하루를 제외하고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일당을 받아 순댓국집에 갔습니다. 주말연속극에서 내가 나오는 찰나, 주문하지도 않은 순댓국이 나왔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순댓국을 먹었습니다. 텔레비전에 반쯤 나온 내가 나를 비웃는 것 같아, 주말연속극이 끝나기 전에 식당에서 나왔습니다.

어디에서 본 것 같다는 말에 서둘러 나왔습니다.

만 원짜리 두 장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았습니다. 천 원짜리 네 장을 카운터에 올려놓고 나왔습니다. 식당 주인이 나를 쫓아 이천 원을 돌려줍니다. 나는 웃고 또 웃었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주말연속극 공중화장실에서 미니시리즈 주차장에서 일주일에 삼 일을 제외하고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드라마 세트를 만들었습니다. 이틀 걸려 만든 세트에서 드라마 주인공이 순댓국을 먹었습니다. 주인공의 대사를 따라 하며 순댓국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김태우 시인 / 생존일지

 

 

1999. 12. 31. 23:28 인간이 창문을 열었다. 한기를 끌어안은 눈송이가 들어왔다. 창밖 거리에는 두 발로 선 짐승들이 울부짖었다. 웅성거림이 인간을 유혹했다. 나는 인간에게서 발버둥 쳤다. 인간이 화장실로 들어가 물을 내리자 신음이 사라졌다. 1999. 12. 31. 23:59 화장실 붉은 조명에서 비린내가 났다. 인간이 출처 없는 나를 제 몸에서 밀어 냈다. 나는 태몽 없는 아이. 태몽이 없어 세상도 모르는 아이. 인간이 화장실에서 나를 풀어 놓고 세상으로 나갔다. 나는 울음으로 인간을 붙잡았다. 2000. 01. 01. 00:00 인간이 거리의 함성 틈으로 사라졌다. 박수 소리에서 종이 울리고 폭죽이 터졌다. 함성이 내 울음을 짓밟았다. 나는 밀레니엄에 초청 받지 못한 불청객. 나는 울음이 세상에게 닿을 때까지 입을 닫지 않았다. 세상이 나를 모른 체 했다. 흰 눈이 붉게 내렸다. 2000. 01. 01. 01:19 인간 앞에서 인간 흉내를 냈다. 입에 고인 울음을 모조리 뱉었다. 인간이 또 다른 인간에게 나를 넘겼다. 2000. 04. 04. 04:49 두 발로 선 짐승들이 나를 놓고 둘러앉았다.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나는 죽은 체 했다. 2002. 07. 07. 07:07 죽는 법을 몰라 죽지 못했다. 어느새 나는 두 발 달린 짐승이 되었다. 2004. 04. 04. 01:12 인간이 결박한 탯줄을 목에 감고 잠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2007. 05. 05. 18:18 옆집 아이가 울음과 장난감을 쉽게 바꾸었다. 내게 울음은 몸을 뒤덮은 반점이었다. 아니 허기와 고통이었다. 2008. 10. 18. 04:44 이제 내가 세상을 버려야겠다.

 

 


 

김태우 시인

1990년 대전 출생. 전북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2015년 《시인수첩》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