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숨 시인 / 구름 편의점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편의점에 가면 구름을 찢고 나오는 물고기와 양과 생필품이 있습니다 바코드에 찍힌 사물들이 팔려나가고 새로운 구름 품목들이 입고되는데 신선도 유지를 위해 시간은 입맞춤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질서 있게 놓인 사물들 착하게 사는 아르바이트생의 늦은 점심에 유효기간 지난 김밥이 은유처럼 놓여있습니다 뜬구름이 흘러가도 오빠는 희망을 붙잡을 겁니다 구름의 감정을 바코드처럼 읽으면 측정 불가능한 꿈을 키울 겁니다 계단을 내려가는 오빠의 방향키 성공의 키워드가 캄캄하지만 막막한 구름의 방향까지 읽을 겁니다 구름의 색깔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먹구름도 요령껏 잘 다스리면 됩니다 그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 오빠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구름 편의점에 갑니다 현실을 찢고 나오는 맑은 날을 꼭 보고 말 것입니다
- <시와 사람> 2022, 가을호
이숨 시인 / 꽃 처방
다양한 약들이 구비된 식물원 불안한 이들이 찾아와 자연 치유하는 약국이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꽃의 처방이 다르다 계절과 병의 깊이에 따라 조제하는 약봉지에 들어갈 재료가 분류 된다 우울의 처방약은 해바라기 씨에 박힌 응어리를 만져 주는 것, 틈새에 낀 민들레의 슬픔으로 상심을 달래고 화로 온몸이 독기로 타오를 때는 담벼락 아래 화사하게 웃고 있는 채송화를 가슴에 와락 안은 것만으로 가라 앉힌다 선인장 가시에 주저 앉는다면 어떨까 내가 모르는 상처를 타인에게 주지 않았나 나를 돌아볼 때 나만 아픈 것이다에서 너도 아팠겠다 엔젤트럼펫으로 나도 상처 받았다고 외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식물원 너를 떠나 보내고 상실의 고통으로 가슴 한 구석이 아리다 이곳에 와서 처방 한줌 받아 간다
이숨 시인 / 올리브 나무
올리브 나무 몸속에는 수천 년 묵은 시간이 산다 죽은 나무인 듯 살아있는 나무가 겹겹이 쌓인 옹이를 껴안았다 울음주머니에 담긴 사막의 표정들 건조한 바람 사이로 따가운 햇살의 흔적 속에서 잘려나간 수많은 팔들 나무는 그 피의 울음을 먹고 몸을 부풀렸다 견디는 것이 일상인 가지들 울퉁불퉁한 몸으로 2천 년간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과거와 그 전의 과거로 덧대어진 몸의 기억에 숨구멍은 사라졌다 아름드리 나무는 돌을 껴안는 듯 냉기가 흐른다 올리브 잎은 여전히 바람에 흔들린다
나무의 냉기에 온풍을 달아준 뿌리의 표정을 상상한다 나는 나무 밑동에서 멀리까지 가려 하고 너는 가까이 있으려 한다 나는 심근성일까? 천근성일까? 척박한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직을 포기한 올리브 나무 키는 중요하지 않아 고집이라는 말은 올리브 나무의 신념일지도 모르지 2천여 년을 견디게 한 뿌리의 욕구가 근육이 되어 밖으로 튀어나왔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이 가득하다
이숨 시인 / 씨앗 호떡
호주머니에 씨앗을 가지고 다닌 언니 심한 열병을 앓은 후 가끔씩 단어와 단어 사이, 행간과 행간 사이를 무단횡단할 때가 있어 뇌에 좋다는 씨앗만 잔뜩 먹었는데, 언니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언어가 자꾸 늘어났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난 씨앗의 언어라고 믿었어 몸속에 들어간 씨앗이 발아한 것이라고
언니는 스물두 해를 살다가 떠났고 은행나무 아래 묻혔지 꼼지락거렸던 씨앗으로 다시 돌아간 듯 가을이면 노란 열매가 식탁 위에 올려지고 우리는 언니의 열병을 애도했지 해거리로 풍성하게 씨앗을 품은 화석 같은 언니
아파트 단지 내에 목요일 장터에서 씨앗 호떡을 파는 사람이 있었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언니의 과거를 씹듯 나는 씨앗 호떡을 한입 베어 물었지 꿀처럼 주르르 흐르는 설탕의 맛이 언제나 내겐 쓴맛이었지
「모던포엠」2022.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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