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락 시인 / 잃어버린 비망록
시간에 영혼이 있느냐는 물음에 시간은 있지만 그것은 없다고 답한 적이 있다
삶의 우연에 나와 너의 거리를 대입한다면 말의 매듭은 풀어지고 길은 안개처럼 떠다닐 것이다
추억이란 말만 들으면 슬픔이 밀려오는 건 그 때문일까 이생이 다 가도록 기별은 오지 않는데 허무를 편애하는 시간이 지나가면 영혼이 돌아와 줄까
나는 너의 옛날이고 너는 나의 옛날이 아니다 다만 삶이 우리를 기억할 것이다 안개의 길이 끝난 뒤에 남아 있는 이것을 그것의 은유라고 말하기 위해 일생을 떠돌았다
누군가 영혼에 빛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다른 사람이 되다 만 시간과 발자국마다 수록된 공백의 목록을 보여주리라
신현락 시인 / 노랑의 현재 시각표
기차가 지나고 노랑나비 떼, 향연처럼 피어난다 내 기억은 멀어지는 기적소리처럼 깔리고 산에 들에
노랑 봄이 나네, 가방을 내려놓고 바라보는 들판 너머
햇병아리 입학생들은 낯선 시간 앞에 아픈 사람들은 자기 이름 앞에 다소곳하고 타인의 호명에 경건해져서 내 사랑이 기다리는 타관의 봄이 그렇게 다시 아프고
역으로 가는 길 이정표가 가리키는 그리움 찾아 연두의 촉감은 노랑을 미리 가지고 와 서로 지문이 짓물러지도록 경계를 지운다
연두가 초록으로 몸 섞어 가는 저 물물교환의 아득한 색채의 혼연 노랑 리본, 하양 손수건을 흔들며 기차가 가고
몸으로 말하고 눈으로 알아듣는 아가의 옹알이처럼 앞뒤 문맥이 뒤섞인 색색의 물물(物物)들이 빛으로 팡팡 찬란하여 새들의 울음소리 햇살로 쏟아지는 사월 가로수를 지나 철길을 건너
노랑 봄이 가네, 나는 들판에 가방을 깔고 앉아 언제 어디에서 잠들 줄 모르는 노랑나비의 심장을 생각해보고 색으로 시각을 지워보고, 하염없이
신현락 시인 / 열치매, misty
안개에 이야기가 있다면 음악과 같은 것일까 먼지와 같은 것일까, 지상에 내려앉지 못하고 떠돌면서 아이들이 눈을 감고 술래잡기를 하듯이
청맹과니의 음계로 떠도는 곳. 미래가 과거의 문턱에 넘어져도 꿈처럼 아름다워서 그저 기억의 발목을 잃어버려도 좋은 곳
창을 열자 밀려오고 몰려가는 일각의 휘파람 소리, 빈 허파에 물 차오르다, 바람 빠지는 소리, 가쁜 숨, 몰아, 서고
노래의 후렴처럼 중얼거리는 이름 속에는 한 존재뿐만 아니라 집안 내력이, 구절양장의 서사가 다 들어 있듯이 먼지의 입자 하나에도 시간의 혼돈과 계절이 순환하는 뒤안길이 스며 있으므로 이 안에는 소멸의 음파가 흘러넘쳐도 좋았어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이건 이미 들었단 얘기, 무엇을 하든, 올 때는 갈 때를 알아야 하는데, 그 폐가의 서늘한 깊이, 이무기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캄캄한 수심을 아무도 문턱을 넘으려 하지 않고 철모르는 아이들만 들명날명
그 집은 안개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시간과 먼지의 인과 관계와 놀이와 슬픔의 시차를 반세기가 지나도록 나는 왜 알지 못하고 있는 걸까 창을 열자 어디선가 들려오는 서까래 무너지는 소리, 들고 나니 안개 무덤과 같은 세상이여
누가 피웠을까, 들판의 연기, 그 속에 섞여 있던 한숨과 열기, 안개의 강물로 흘러오는 매운 눈물 빛들 사이로, 보일 듯 말듯, 무엇을 태웠을까, 백 년 후의 편지, 내가 돌아가는 건지 누가 돌아오는 길인지, 그 옛날, 심장과 허파 사이, 혹은 안개의 아가미에, 갇혀 있던, 빛의 전언,
아이들이 눈을 감고 술래를 찾듯이 어제를 상상하고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이야기처럼 내일을 기억할 때 안개의 기억으로 가로지르는 슬픔이 부재가, 흰빛이 나를 떠돌게 한다
시간에 감각이 있다면 빛에서 왔을까 천변의 안개로 흩어지는 기억의 거처 안에서 이야기와 시간, 백 년과 음악의 차이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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