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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윤우 시인 / 두물머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4.

박윤우 시인 / 두물머리

 

 

 서울을 다녀온 가을과 오리의 뭉툭한 부리

 물기슭이 된 오후 네 시

 가을은 제법 구체적인데 물이 물로 빼곡하다

 

 물길이 물을 닦는다 광발 나는 저 물 곁에서 누구는 언약을 하고, 누구는 한 눈을 팔고, 누구는 담배를 문 채 내렸던 바지를 올리고 또 누군가는 물을 퍼 담아 물침대 매트를 채우겠다

 

 오리가 물의 부리 모양의 구멍을 낸다 구멍 속으로 낙하한다 오리가 오리를 부려 넣고, 부려 넣은 오리를 오리가 들어낸다

 

 부리를 앞세우는 새, 물갈퀴를 벗어두고 떠난 새 한 마리

 

 바바리코트의 깃을 세운 중년 여인이 반백 신사의 겨드랑이에 날개처럼 돋았다 모텔 현관문을 밀고 들어선다

 

 나오려고 들어가고 들어가려고 나오는 사람, 그리고 오리백숙

 분질러진 이쑤시개 같은 오후 네 시, 늘 네 시 5분 전인 백숙집 들마루, 손차양을 한 늙은이 하나 십전대보탕에 초토화된다

 

 서른하나 서른둘, 서른일곱, 쉰셋.....

 들락거리는 오리주둥이

 

 청머리오리 등짝에서 또르르 굴러떨어지는 자줏빛 가을

 가을을 타는 누군가 좌변기의 물을 내리고, 누가 벽 너머에서 그 물소리를 듣고 있다

 

 오후 네 시가 온데간데없다 물이 된 두 물머리처럼

 

-시집 <저 달, 발꿈치가 없다> 시와반시

 

 


 

 

박윤우 시인 / 별일 없지?

 

 

식구는 나간 사람 둘에 죽은 사람 하나, 아무나 보고 꼬리 치는 개 청이와 멍이, 그리고 나다

말 거는 이가 나 하나뿐이어서 혼자서 무성한 집

 

하늘에 실고추 송송, 감자전 한 판 떴다

 

느릿느릿 기어가는 무자치 한 마리 다시 보니 나뭇가지다 웅덩이가 하늘에 뜬 빈 비닐봉지를 물기슭으로 걷어내고 있다

 

근심이 많은 사람은 바닥을 지고 자고, 근심이 더 많은 사람은 바닥을 안고 잔다 근심 없는 나는 모로 누워 티비나 보며 조는데, 졸다 굴러 떨어졌는데 팔짱 낀 소파, 팔짱 낀 쿠션이 떨어져서도 조는 나를 내려다본다

 

장롱 밑으로 굴러 들어간 모나미볼펜이 손이 닿지 않는 곳을 만든다

 

닿지 않는 곳으로 간 사람을 떠올리는 일은, 장롱 밑으로 굴러 들어간 볼펜을 더듬어 찾는 것 같다

 

포항 죽도동 언덕배기 연립주택 옥상에서 빨래를 널던 첫째 딸이 물 묻은 손가락으로 뒤적일지도 모를, 미국 KBR 휴스턴지사에서 파트타임을 뛰는 둘째 딸이 키보드를 두드리느라 지나칠 지도 모르는 문자

 

별일 없지?

 

하늘귀 감자전 한 판 다 익도록 지나친 기일(忌日), 어쩌자고 종이컵에 비벼 넣은 담뱃불이 좀체 꺼지지 않는다

 

 


 

박윤우 시인

경북 문경 출생. 대구교육대학 졸업. 2018년 《시와 반시》를 통해 등단. 초등교사 2년, 검정고시를 거쳐 중등 미술교사 10년, 대구 제3미술학원을 운영. 시집으로 『저 달, 발꿈치가 없다』(시와반시, 2020)가 있음. 2018년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수상. 2019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