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우 시인 / 두물머리
서울을 다녀온 가을과 오리의 뭉툭한 부리 물기슭이 된 오후 네 시 가을은 제법 구체적인데 물이 물로 빼곡하다
물길이 물을 닦는다 광발 나는 저 물 곁에서 누구는 언약을 하고, 누구는 한 눈을 팔고, 누구는 담배를 문 채 내렸던 바지를 올리고 또 누군가는 물을 퍼 담아 물침대 매트를 채우겠다
오리가 물의 부리 모양의 구멍을 낸다 구멍 속으로 낙하한다 오리가 오리를 부려 넣고, 부려 넣은 오리를 오리가 들어낸다
부리를 앞세우는 새, 물갈퀴를 벗어두고 떠난 새 한 마리
바바리코트의 깃을 세운 중년 여인이 반백 신사의 겨드랑이에 날개처럼 돋았다 모텔 현관문을 밀고 들어선다
나오려고 들어가고 들어가려고 나오는 사람, 그리고 오리백숙 분질러진 이쑤시개 같은 오후 네 시, 늘 네 시 5분 전인 백숙집 들마루, 손차양을 한 늙은이 하나 십전대보탕에 초토화된다
서른하나 서른둘, 서른일곱, 쉰셋..... 들락거리는 오리주둥이
청머리오리 등짝에서 또르르 굴러떨어지는 자줏빛 가을 가을을 타는 누군가 좌변기의 물을 내리고, 누가 벽 너머에서 그 물소리를 듣고 있다
오후 네 시가 온데간데없다 물이 된 두 물머리처럼
-시집 <저 달, 발꿈치가 없다> 시와반시
박윤우 시인 / 별일 없지?
식구는 나간 사람 둘에 죽은 사람 하나, 아무나 보고 꼬리 치는 개 청이와 멍이, 그리고 나다 말 거는 이가 나 하나뿐이어서 혼자서 무성한 집
하늘에 실고추 송송, 감자전 한 판 떴다
느릿느릿 기어가는 무자치 한 마리 다시 보니 나뭇가지다 웅덩이가 하늘에 뜬 빈 비닐봉지를 물기슭으로 걷어내고 있다
근심이 많은 사람은 바닥을 지고 자고, 근심이 더 많은 사람은 바닥을 안고 잔다 근심 없는 나는 모로 누워 티비나 보며 조는데, 졸다 굴러 떨어졌는데 팔짱 낀 소파, 팔짱 낀 쿠션이 떨어져서도 조는 나를 내려다본다
장롱 밑으로 굴러 들어간 모나미볼펜이 손이 닿지 않는 곳을 만든다
닿지 않는 곳으로 간 사람을 떠올리는 일은, 장롱 밑으로 굴러 들어간 볼펜을 더듬어 찾는 것 같다
포항 죽도동 언덕배기 연립주택 옥상에서 빨래를 널던 첫째 딸이 물 묻은 손가락으로 뒤적일지도 모를, 미국 KBR 휴스턴지사에서 파트타임을 뛰는 둘째 딸이 키보드를 두드리느라 지나칠 지도 모르는 문자
별일 없지?
하늘귀 감자전 한 판 다 익도록 지나친 기일(忌日), 어쩌자고 종이컵에 비벼 넣은 담뱃불이 좀체 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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