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경 시인 / 한 토막의 저녁
백 년 만의 가뭄이라고 떠들썩할 때 빗방울 뛰어내렸다 지붕 위 고양이들 물방울 털어내며 담장을 넘어갔다 쌀 씻는 소리에 담 밑 어슬렁거리는 저물녘 공기 저녁은 돌아오는 길 잃지 않고 허기를 데려왔다 고양이 털에 붙은 빗방울, 다시 담을 넘어왔고 도마 위에는 고등어 한 마리 마지막 물살 떼어낸 자세로 얼어있다 몸통과 지느러미 사이에 남은 파도의 실뿌리들, 한 손에 다 잡히지 않는 바다를 뱉어낸다 돌아갈 수 없으므로 돌아보지 않는 눈, 물끄러미 나를 본다 양파 썰고 육수를 내는 동안 백 년을 기다려 당도한 가뭄, 장맛비에 풀어지고 내 것이지만 한 사람의 것 같지 않은 궁기 한 냄비 안에서 끓는다 냄새를 맡은 저녁 한 마리, 고등어 토막을 물고 골목으로 사라진 뒤 마당 위로 까만 눈동자들 우릉우릉 내려온다
김정경 시인 / 그늘을 접어 날리다
이른 아침 쫓아 나가 남편의 지갑을 뺏어 들고 돌아온 아래층 여자가 대청소한다 방 안에 갇혀 지내던 화장대가 마당으로 불려 나왔다 막막한 표정으로 서있다. 주말 앞둔 밤 느닷없이 아래층 안방 문이 열리고 아버지 다 봤다니까요, 오토바이 뒤에 타고 있던 그 여자! 군자란 화분이 뛰쳐나왔다 나잇값 좀 하세요, 재떨이가 화장대 거울을 들이받았다 신발장에서 쫓겨난 신발들이 속까지 흠뻑 젖는 줄도 모르고 물청소하는 여자 나는 널어놓은 이불을 고쳐 너는 척하면서 그늘을 접어 그녀 쪽으로 슬쩍 날려 보낸다 세탁기에서 옷가지를 꺼내 든 여자의 옆구리에 식구들 팔다리가 영영 풀리지 않을 것처럼 엉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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