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철 시인 / 적설
죽은 사람의 얼굴 위로 흰 천을 덮는 것은 죽음을 가리려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게 삶의 누추를 들키지 않으려는 것이다 사랑이 끝난 지표 위에 눈이 쌓여 덮인다 사랑 이후의 남루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누군가의 이름을 한사코 지우려는 결기 같은 것들 끝내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차라리 묻어버리려는 마음 같은 것들이 무수한 점묘의 붓끝이 되어 지상을 덮는다 방치된 차들의 검은 지붕과 지붕이 내려앉은 슬픔의 가옥들 도시의 흉곽을 길게 찢어놓은 검은 도로 위로 거대한 데드마스크가 떠오른다.
-시집 『낭만적 루프탑과 고딕의 밤』 중에서
장수철 시인 / 다음이 없는 경우
편의점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채우면서 다음의 경우를 생각하다가 표시 선을 넘어버린다
다음의 경우라면 한계 수위를 넘었더라도 일정 정도의 체내 염도 유지를 위해 삼각김밥이나 가염 반숙란을 추가 할 수 있을 것이지만 다음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고 컵라면이 익어가기를 기다리다가 잔반 국물통에 한계 수위를 넘실거리는 라면 국물처럼 붉게 물든 취식대 통유리 쪽 노을빛을 넋없이 바라본다
다음의 경우라면 어떠한가 전자렌지에 데운 김밥의 단무지가 뜨거워져 버린 것 씹던 단무지를 뱉어버리고 세상은 버려진 라면 국물이 넘실거리는 국물통 같다고 생각하다가 다음의 경우를 생각하려던 이 한계 수위를 넘어버린 삶의 다음이 없는 경우라면
-세계일보/박미산의 마음을 여는 시
장수철 시인 / 팔이 두 개만으로는 허전하다고 에밀 아자르가 말했을 때*
나는 안다 그 허전함의 기원을 팔이 세 개였다면 아니 네 개였다면 혹은 팔이 없는 비단뱀처럼 무릎에서부터 너를 온몸으로 감아 오른다면 안와상융기 아래로 오래된 두 개의 우물처럼 고인 네 두 눈의 고요를 바라 볼 때의 신비를 나와 계통적으로 멀고 먼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꿈꾸는 일의 아픔을 어떤 다른 차원의 이념이나 살결로 느껴가는 것들의 서툰 조바심을 소리가 아닌 다른 물질이나 파동으로 사랑을 전할 때 그 사멸하는 마지막 순간의 별빛 같은 찬란을 내가 비단뱀처럼 세칭 혀라는 것으로 너의 향기를 내 안에 음각할 때 나는 너를 천천히 감아 오르며 이것이 우주의 가장 춥고 높은 고원이거나 극지일거라고 생각할 때의 아득함을 나는 안다 내게 두 개의 팔이 너무 많거나 부족하거나 하지 않고서 지금 이렇게 간절할 수 없음을 *로맹가리의 소설 [그로칼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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