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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경 시인 / 한 토막의 저녁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7.

김정경 시인 / 한 토막의 저녁

 

백 년 만의 가뭄이라고 떠들썩할 때 빗방울

뛰어내렸다 지붕 위 고양이들

물방울 털어내며 담장을 넘어갔다

쌀 씻는 소리에 담 밑 어슬렁거리는

저물녘 공기

저녁은 돌아오는 길 잃지 않고

허기를 데려왔다

고양이 털에 붙은 빗방울,

다시 담을 넘어왔고

도마 위에는 고등어 한 마리

마지막 물살 떼어낸 자세로 얼어있다

몸통과 지느러미 사이에 남은 파도의 실뿌리들,

한 손에 다 잡히지 않는 바다를 뱉어낸다

돌아갈 수 없으므로 돌아보지 않는 눈,

물끄러미 나를 본다

양파 썰고 육수를 내는 동안

백 년을 기다려 당도한 가뭄, 장맛비에 풀어지고

내 것이지만 한 사람의 것 같지 않은 궁기

한 냄비 안에서 끓는다

냄새를 맡은 저녁 한 마리,

고등어 토막을 물고 골목으로 사라진 뒤

마당 위로 까만 눈동자들

우릉우릉 내려온다

 

 


 

 

김정경 시인 / 그늘을 접어 날리다

 

이른 아침 쫓아 나가 남편의 지갑을

뺏어 들고 돌아온

아래층 여자가 대청소한다

방 안에 갇혀 지내던 화장대가

마당으로 불려 나왔다

막막한 표정으로 서있다.

주말 앞둔 밤

느닷없이 아래층 안방 문이 열리고

아버지 다 봤다니까요, 오토바이 뒤에 타고 있던 그 여자!

군자란 화분이 뛰쳐나왔다

나잇값 좀 하세요, 재떨이가 화장대

거울을 들이받았다

신발장에서 쫓겨난 신발들이 속까지 흠뻑

젖는 줄도 모르고 물청소하는 여자

나는 널어놓은 이불을 고쳐 너는 척하면서

그늘을 접어 그녀 쪽으로 슬쩍 날려 보낸다

세탁기에서 옷가지를 꺼내 든

여자의 옆구리에

식구들 팔다리가 영영 풀리지

않을 것처럼 엉켜있다

 

 


 

김정경 시인

경남 하동 출생.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북작가회의 회원. 현재 전주MBC 라디오 작가. 시집 <골목의 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