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미 시인 / 내막
한낮에 불쑥 나타난 유령이 중얼거린다 사실은 나도 너무 무서워 어제의 어둠과 오늘의 어둠이 다르다는 것이 수만 개의 밤을 건너왔지만 한참 더 남았다는 사실이 지나온 것들이 쌓이지 않는다 사라지지도 못하면서 매일 밤 헤매고 다녀도 길이 나지 않아 잘못 든 데를 또 들어가면서도 낯설기만 할 뿐이지 발이 필요해 뭔가를 딛고 서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 죽은 자도 소망이 있다 매일 기대해 오늘 밤을 맞지 않기를 나를 떠나기를
전영미 시인 / 내막
너무 우거지면 무서워 그게 빛이라도 땡볕에 쭈그리고 앉아 땅을 판다 여러 개의 구덩이에 빛을 나눠 묻고 잘 덮는다 그 앞에 공들여 가꾼 어둠 한 다발을 올려 둔다 천천히 시들어 가는 한낮 햇볕에 화상 입은 장미허브를 그늘로 옮긴다 거기서 오래 앓을 것이다 말라 죽지도 못하고 연한 자리마다 하얗게 탄 이파리들 저물어 가는데도 어둠에 싸이지 않고 데인 곳이 환하다 더 큰 빛을 만들려고 흰색을 칠할수록 어두워진다
전영미 시인 / 시작되지 않은 오래된 이야기
이것은 오래전부터 누군가 했던 얘기 한 번 더 한다고 해서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얘기 드디어 고목에 꽃이 핀다고 했지 꽃은 아직 고목을 찾지 못했고 그렇다면 내가 피는 걸로 하겠다 먼저 천 년 기다려 고목부터 만들어야겠지 그런 뒤 가지 끝에 오래 품고 있던 꽃망울을 매달고 있는 힘 다해 한 송이 한 송이 나를 피워 올려야지 그 때 천 년을 숨죽이며 살던 바람이 시커먼 입김을 불지도 몰라 오래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뱉어 낼지도 몰라 이제 막 퍼져 나가려던 내 향기를 악취로 바꿔버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이제는 바람으로 피어오르기로 하겠다 우선 또다시 천 년을 기다려 고목부터 만들어야겠지 그러고 나서 순한 바람이 검은 입김 토해 낼 때까지 땅바닥을 수만 번 뒹굴도록 해야겠지 지칠 대로 지친 바람이 이제 막 벙그는 꽃 이파리 한 장 한 장 말려 버릴 때 그 순간 나비 한 마리 날아와 계속 맴돌지도 몰라 이미 천 년 전에 말라 죽은 고목은 흔적조차 없는데 나비는 바람에 휘감겨 계속 떠밀려 갈지도 모르지 온통 검은 물 든 나비는 영원히 마르지 않을 젖은 날개 하염없이 퍼덕일지도 모르지 이것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는 이야기 여기서 끝난다고 해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 -2022년 아르코 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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