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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Daisy Kim 시인 / 룹알할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8.

Daisy Kim 시인 / 룹알할리*​

​우리가 사막으로 간 이유는 없었다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빛을 다발로 산란하는 모래언덕과 변경주**때문이었다

몇 켤레의 계절이 서로의 심장으로 느리게 걸어 들어갔다

실핏줄이 우리를 끌어당기며 둥근 보폭으로 돌았다

모래로 덮인 세계

태양의 얼룩을 봉우리에 숨긴 알몸의 낙타들

여독에 지친 하루를 사막에 가두면 어제의 앞뒷면이 공백으로 남았다

구름은 같은 일기예보를 몰고 다니며 모래의 물렁한 척추를 맴돌았다

지름길이 없는 모래의 물결

흰 블라우스에 건기의 무늬를 바느질했다

끝없이 부르고 싶은 이름에 단추를 채웠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마음은 낡은 믿음이 되었다

오아시스를 찾고 싶어 발 디디면 깊숙해지는 발자국 속으로 없던 이유가 생겼다

서로의 그늘 쪽으로 깊어지던 사막은 늘 방향을 의심했다

​​

• 공백지대

** 선인장

-시와 반시 2023. 봄

 

 


 

 

Daisy Kim 시인 / 오브제를 빌리다

 

 

맨드라미에 사과즙을 발라 붉음이 울창해지는 꿈의 정원을 걸어요

우리는 다른 증상을 앓으며 같은 전염병으로 흩어진 세계에서 안개의 무늬로 감염되었어요

먼지를 뒤집어쓴 교회의 종소리는 낡은 의성이라 물구나무선 음표들을 쏟아냅니다

풀어지지 않는 하늘의 실타래로 감아둔 신의 목소리

금이 간 유리잔 속으로 눈송이처럼 떨어지는 믿음이 발자국을 따라옵니다

해안선이 마르지 않는 폭우의 빗금들로 뒤덮입니다

웅크린 시간의 넝쿨이 내일로 뻗어가기 위해 빗방울에는 모서리가 없을 것

실패가 많은 폴더들로 꽉 찬 나무의 페이지를 넘겨요

무색무취의 꽃다발로 묶인 즐겨찾기의 물음들이 나비를 지웁니다

감은 눈 안에 방금 돋아난 별을 수놓습니다

계절의 착취를 반복하며 옮겨가는 호칭

시계의 미닫이를 열고 사물의 일대기가 빠져나갑니다

 

『미네르바』 2022년 가을호 신진조명 수록작

 

 


 

 

Daisy Kim 시인 / 대관령을 지나는 배경에는 덕장이 있다

 

 

얇은 옷차림으로 떠난 하루는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했다

열한 살의 축축한 기분을 내다 걸면 당신의 척추 위에서 꾸덕꾸덕 말라가던 성장기

배곯은 허공이 세를 늘리면 겨울은 허리를 접었다

중력을 잃어버린 칼바람은 기다렸다는 듯 검은 목구멍 같은 터널을 지나야만 했다

비릿한 호흡으로 직립을 견디면 다시 바다의 껍질이 속살을 부풀리는 겨울,

어디에도 지붕은 없었다

이국의 이름으로 포장지에 담겨도 날씨에 따라 나는 먹태이거나 황태였다

하늘에 줄 하나를 그으며 부푼 한철에 시간을 걸고 있는 아버지에게로 가는 길

부은 발등 위에 노릇노릇 떨어지는 별똥별

어둠의 뒤꿈치를 밟고 사라진 날들이 신발을 고쳐 신고 있다

 

『시와문화』 2022년 겨울호 <포커스, 젊은 시 5인선>

 

 


 

Daisy Kim 시인

서울에서 출생. 하와이에 거주. 2020년 《미네르바》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