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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도종환 시인 / 나리소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8.

도종환 시인 / 나리소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가장 고요해지는 사랑이 깊은 사랑이다

나릿재 밑에 나리소

못이 가장 깊고 고요하듯 요란하고

진부한 수식이 많은 사랑은

얕은 여울을 건너고 있는 사랑이다

사랑도 흐르다 깊은 곳을 만나야 한다

여울을 건너올 때

강물을 현란하게 장식하던 햇살도

나리소 앞에서는 그 반짝거림을 거두고

조용해지듯 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마음이 가장 깊고 착해지지 않으면

진짜 사랑 아니다

물빛처럼 맑고 투명하고 선해지지 않으면

 

 


 

 

도종환 시인 / 겨울 나무

 

 

잎새 다 떨구고 앙상해진 저 나무를 보고

누가 헛살았다 말 하는가

열매 다 빼앗기고 냉랭한 바람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누가 잘못 살았다 하는가

저 헐벗은 나무들이 산을 지키고

숲을 이루어내지 않았는가

하찮은 언덕도 산맥의 큰 줄기도

그들이 젊은날 다 바쳐 지켜오지 않았는가

빈 가지에 새 없는 둥지 하나 매달고 있어도

끝났다 끝났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실패했다고 쉽게 말하지 말라

이웃 산들이 하나씩 허물어지는 걸 보면서도

지킬 자리가 더 많다고 믿으며

물러서지 않고 버텨온 청춘

아프고 눈물겹게 지켜낸 한 시대를 빼놓고

 

-시집 『부드러운 직선』(창작과비평사, 1998)

 

 


 

 

도종환 시인 / 폭설

 

 

폭설이 내렸어요 이십 년만에 내리는

큰눈이라 했어요 그 겨울 나는 다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지요

때묻은 내 마음의 돌담과 바람뿐인

삶의 빈 벌판 쓸쓸한 가지를 분지를 듯

눈은 쌓였어요

길을 내러 나갔지요

누군가 이 길을 걸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오는 길을 쓸러 나갔지요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먼지를 털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내 가슴 속

빈 방을 새로 닦기도 했어요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내 사랑 누군가에게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기보다는

소리 없이 내려서 두텁게 쌓이는 눈과 같으리라 느꼈어요

새벽 강물처럼 내 사랑도 흐르다

저 홀로 아프게 자란 나무들 만나면

물안개로 몸을 바꿔 그 곁에 조용히 머물고

욕심없이 자라는 새떼를 만나면

내 마음도 그렇게 깃을 치며 하늘을 오를 것 같았어요

구원과 절망을 똑같이 생각했어요

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마지막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의 그 눈들의 남은 시간을

그러나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어요

눈물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고통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일도 또한 그러하겠지만

눈물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다시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더 이상 어두워지지 말자는 것이었지요

 

 


 

도종환(都鍾煥) 시인

1954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학과 및 충남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84년《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두미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릉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등이 있고,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등과 동화 『바다유리』 등이 있음. 1997년 제7회 민족예술상 수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