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시인 / 나리소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가장 고요해지는 사랑이 깊은 사랑이다 나릿재 밑에 나리소 못이 가장 깊고 고요하듯 요란하고 진부한 수식이 많은 사랑은 얕은 여울을 건너고 있는 사랑이다 사랑도 흐르다 깊은 곳을 만나야 한다 여울을 건너올 때 강물을 현란하게 장식하던 햇살도 나리소 앞에서는 그 반짝거림을 거두고 조용해지듯 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마음이 가장 깊고 착해지지 않으면 진짜 사랑 아니다 물빛처럼 맑고 투명하고 선해지지 않으면
도종환 시인 / 겨울 나무
잎새 다 떨구고 앙상해진 저 나무를 보고 누가 헛살았다 말 하는가 열매 다 빼앗기고 냉랭한 바람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누가 잘못 살았다 하는가 저 헐벗은 나무들이 산을 지키고 숲을 이루어내지 않았는가 하찮은 언덕도 산맥의 큰 줄기도 그들이 젊은날 다 바쳐 지켜오지 않았는가 빈 가지에 새 없는 둥지 하나 매달고 있어도 끝났다 끝났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실패했다고 쉽게 말하지 말라 이웃 산들이 하나씩 허물어지는 걸 보면서도 지킬 자리가 더 많다고 믿으며 물러서지 않고 버텨온 청춘 아프고 눈물겹게 지켜낸 한 시대를 빼놓고
-시집 『부드러운 직선』(창작과비평사, 1998)
도종환 시인 / 폭설
폭설이 내렸어요 이십 년만에 내리는 큰눈이라 했어요 그 겨울 나는 다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지요 때묻은 내 마음의 돌담과 바람뿐인 삶의 빈 벌판 쓸쓸한 가지를 분지를 듯 눈은 쌓였어요 길을 내러 나갔지요 누군가 이 길을 걸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오는 길을 쓸러 나갔지요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먼지를 털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내 가슴 속 빈 방을 새로 닦기도 했어요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내 사랑 누군가에게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기보다는 소리 없이 내려서 두텁게 쌓이는 눈과 같으리라 느꼈어요 새벽 강물처럼 내 사랑도 흐르다 저 홀로 아프게 자란 나무들 만나면 물안개로 몸을 바꿔 그 곁에 조용히 머물고 욕심없이 자라는 새떼를 만나면 내 마음도 그렇게 깃을 치며 하늘을 오를 것 같았어요 구원과 절망을 똑같이 생각했어요 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마지막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의 그 눈들의 남은 시간을 그러나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어요 눈물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고통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일도 또한 그러하겠지만 눈물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다시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더 이상 어두워지지 말자는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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