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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희국 시인 / 작은 위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8.

이희국 시인 / 작은 위로

 

 

"밥은 먹었니?"

무심히 던진 한마디가

허기진 나의 의지에

한끼의 정찬이 되어주던 때가 있었다

 

"안녕!"

미소 지으며 던져 준 가벼운 말이

종일 환한 빛으로

어두운 마음을 위로하던 때가 있었다

 

누구에게 어떤 파도가 몰아닥칠지

아무도 모르는데,

 

구걸하는 이들에게

"도우면 버릇만 나빠져"

의미없이 던지는 가시 돋친 말 한마디가

나의 하루를 우울하게 한다

 

한겨울에도 냉기를 껴안고 사는 노숙인들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고 싶다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라도.

 

 


 

 

이희국 시인 / 바위

 

 

무성한 잡초들이

찬바람에 스러져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한 아름 푸르게 살다가

구새먹어 텅 비어버린 고목들이

흙으로 돌아간 쓸쓸한 발자취를

보고 있었다

시든 들판이

새봄의 노래로 뭉클하게 피어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먼 길을 걸어온 시간이

또 다른 시간에 밀려 어디론가 쫓겨 가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늘 그 자리에서

바위라는 이름으로

 

 


 

 

이희국 시인 / 안과 밖

 

 

빙점 아래로

스무 계단 내려간 수은주

창밖 풍경이 굳어있다

 

표정 없이 긴장한 사람들

언 마음을 데우려

뿌연 입김을 흘리며 걷는 저녁

바람의 채찍에 가로수는 울고

이파리와 가지까지 하얗게 덮인 장미나무도

얼음조각에 맨살이 트고 있다

 

회색 허공에서 윙윙대는 바람은

먹이를 찾는 듯 발톱을 세우지만

열기를 삼키며 녹아내린 유리창

이 벽 한 장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

 

공격이 거칠수록 활짝 핀 성에 꽃

북풍이 등을 보이면 꽃이 질 것이다

녹아내릴 시간을 기다리는데

밖에 서 있는 풍경이 유리창을 두드리다 돌아간다

 

아늑한 이곳과

저 곳은 너무 멀다

 

 


 

 

이희국 시인 / 공덕역

 

 

이곳에 오면 땀내가 난다

서울역 뒤편 만리동 산비탈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정병구 씨집 문간방이 내가 태어난 둥지였다

 

캄캄하던 삶의 나루터에서

건너편 여의도 밤 불빛을 무심히 바라보던

종점의 사람들

 

밥을 찾아 안암동 금호동 면목동을 떠돌았다

고교 평준화 공동학군 화살촉에 꽂혀

나는 이곳에 다시 돌아왔다

하룻밤 연탄 60여장 갈며

잠자리와 삼양라면 한 상자로 급여를 받던

서울여고 앞 진학 독서실

고교 3년간, 나는 졸음이 묻은 연탄집게를 들고 살았다

여름 방학이면 삼복의 뙤약볕이 팔뚝에 꽂히던

최대포집 앞 공사장

벽돌을 지고 출렁거리는 난간을 타고 올랐다

땀에 절은 작업복의 악취를 숨겨주던

함바집 청국장

밥 한술 뜨면 왠지 모를 서러움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삶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시절

그러나 그 길은 언덕 너머를 바라보며

꿈의 다리를 향해 걷던 시간

 

아득해 보였지만 지나고 보니 참 짧은 거리였다

 

 


 

 

이희국 시인 / 그때 번개가 지나갔다

 

 

강풍이 불고

번개가 빗금을 그으며 지나갔다

 

꼿꼿하던 해바라기가 목을 꺾었다

검은 허공이 우레와 함께 또 한 번 빗금을 쳤다

그 소리는 내 정수리를 다 적셨다

 

창문까지 흔들며 뒤쫓아 오는 천둥소리에

그림자 뒤로 숨겨놓은 기억을 꺼내본다

지은 죄가 몇 가지나 되는지

 

길을 가다가 개미를 밟은 적이 있었다

밟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느 날 나뭇가지를 무심코 꺾은 적이 있었다

그 나무는 어쩔 수 없이 새순을 내밀었지만

애초에 그가 원하던 방향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비밀을 길에 흘리기도 하였다

 

그것들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또 한 번 번쩍, 이실직고 하라고 죽비를 친다

 

창밖의 나무는 지은 죄가 없는지

태연히 비를 맞고 있다

 

 


 

 

이희국 시인 / 이별 준비

 

 

빛바랜 사진들이 버려진 어머니 방 휴지통

어느 봄날과 어느 겨울이 함께 구겨져 있다

 

젊은 시간을 돌아보며 목이 멘 걸까

찢어지고 구겨진 생의 살점들

구순 노인의 이별 준비, 흔적을 지우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평생을 지켜온 순간의 화면들

묶음으로 가지런한 내 사진첩을 오랜만에 펼쳐본다

 

한때 함께했던 그날의 순간들은

지금도 환하게 나를 맞는데

삶의 대지를 쓸고 간 시간의 바람은

그들의 흔적을 흐릿하게 지워 버렸다

 

기약 없는 꿈과 희망을

새처럼 지저귀게 해주던 친구들

육지를 향해 달려오던 파도처럼 출렁이던 사람들

애써도 잡지 못한 시간과

잊으려 해도 영원히 맴도는 날이 봉함되어 있다

 

되새기기 싫은 인연

버리고 싶은 사진들을 고르다가

다시 넣는다

 

아직 나는 이별이 준비되지 않았다

 

 


 

이희국 시인

1960년 서울 출생. 2017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파랑새는 떠났다』 『다리』 『자작나무풍경』과 공저 『씨앗의 노래』 외 다수. 한국문학비평가협회작가상 수상. 국제PEN한국본부 회원, 한국문인협회 재정협력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월간 문예사조 편집위원회 회장. 약사, 가톨릭대학교 약학대학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