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강 시인 / 물방울
제단에 오른 사제가 깊숙이 몸을 숙여 제대에 입맞춤을 한다 당신의 종, 낮은 자리의 종이오니
등을 낮게 구부리는 순간
물방울 사제는 동그랗고 작은 물방울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방울 가벼워 두둥실 떠오르는 물방울 날아가는 물방울
물방울에서 물방울이 작은 물방울이
커다란 물방울이 된다
지구처럼 커다란 물방울 태양처럼 커다란 물방울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는 물방울이 된다
김예강 시인 / 종이처럼
눈앞에서 고양이가 까치 한 마리를 낚아채고 날았다 계단에서 까치를 물고 고양이가 날자 계단이 허물어진다 눈앞에서 계단이 비명을 지른다 종이처럼 찢어지기라도 한 듯, 종이라서 지워지기라도 한 듯 비명을 지른다. 계단 위를 날며 살아남은 까치들이 운다 슬픔이 시작한 눈앞에서 슬픔이 천막을 친다 늙은 벚나무가 버찌를 후두두둑 떨구고 운다 바닥은 슬픔이 흥건하다 슬픔은 검고 슬픔은 번진다 구름 속에 태양이 검은 옷을 입고 운다 까치들은 눈알을 빼고 운다 눈앞에서 허물어진 계단이 슬픔으로 태어난다 행인들이 서서히 구겨졌던 몸을 펴서 느리게 걸어간다
김예강 시인 / 도마
소나무 주름을 만져 보기로 하자 두 팔은 구름을 안고 숙성될 때까지
구름은 냉장고에 넣어두자 금방 뚝뚝 수국송이가 나오네 오븐에 넣을까말까
구름을 안고 부엌을 닦는다 털이 하얀 고양이 눈동자는 하늘색이야 집에 가자
멜빵바지 속 구름을 끄집어내자 건초더미 속으로 건초더미로 비 칼질하는 비
화요일 오전은 비가 내리지 않네 구름을 열어 가방을 꺼내자 홈질된 식탁 매트 좀 꺼내 줄래
화요일 오전은 비가 내리지 않네
이제 도마를 안고 달리자 심장이 아직 뛰고 있는 소나무 나이테를 안아주자 살림이 힘들었겠구나 몇 살이지
김예강 시인 / 가설 정원
도시는 딱딱하고 싱싱한 꽃이 피었다 망망 초원이고 게르이고 검고 작은 씨앗이고 누구의 배꼽
도시는 싱싱한 꽃을 팔았다 가설했다 도시는 향기를 가설하고 가을을 가설하고 가설한 행복을 심었다
도시에 사이렌이 울고 가설정원은 개장했다 정원 관람객은 시들지 않는 꽃들을 관람했다
유랑극단 서커스를 상상하고 나는 수직정원 꽃들을 소비했다 꽃을 사러 왔나요 핸드메이드 꽃들은 신발을 벗지 않았다 벽에 붙은 꽃은 뛰어내리지는 않았다
도시는 밤에 꽃들을 방목했다 혹자가 유목정원이라고 했다 도시는 트럭에 가을정원이라는 간판을 떼어 넣고 가축을 몰고 초원을 찾아 떠났다 -시집 『가설정원』(시인의 일요일, 2023)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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