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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안나 시인 / 손톱의 서정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8.

서안나 시인 / 손톱의 서정

 

 

손톱은 내가 처음 버린 영혼

손톱은 영혼이 타원형이다

 

손톱은

죽어서 산다

끊임없이 나를 밀어낸다

 

손톱을 오래 들여다보면

나무뿌리가 뻗어 나오고

진흙으로 두 눈을 바른 아이가

더러운 귀를 씻고 있다

 

손톱을 깎으면

죽은 기차들이 나를 통과해 가고

늙은 쥐가 손톱을 먹고 있다

 

늘 바깥인 손톱의 밤은

얼마나 캄캄한가

사랑은 개연성 따위는 필요 없다

 

멀리 날아간 손톱은

가끔 얼굴이 되기도 한다

 

 


 

 

서안나 시인 / 애월 2

 

 

내 늑골에 사는 머리 검은 짐승을 버렸다

애월이라 부르면 밤에 갇힌다

검정은 물에 잘 녹는다

 

맨발로 돌 속의 꽃을 꺾었다

흰 소와 만근의 나무 물고기가 따라왔다

 

백사장에 얼굴을 그리면

물로 쓰는 전언은

천개의 밤을 끌고 온다

귀에서 천둥이 쏟아진다

 

시집에 끼워둔 애월은 눈이 검다

수평선에서 밤까지 밑줄을 그어본다

검정은 물에 잘 녹는다

검정은 어디쯤에서 상심을 찢고 태어나나

나는 밤을 오해한다

 

나는 오늘부터 저녁이다

 

 


 

 

서안나 시인 / 먼지 인간 2

 

 

우리는 두 번째 토요일에

3-1번 출구에서 모입니다

누군가 새로운 시집이 나온다고 하네요

참석할 것이라며

모두 핸드폰에 메모했습니다

시집이 그날 나오지 않더라도

반드시 만나자고 웃으면서요

3층에서 만나 1층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습니다

1층의 약속은 더 전생에 가깝지요

뜨거운 여름 한강변에서 만나

뜨거운 삼겹살을 먹고

뜨거운 차를 마시고

우리는 뜨거운 강과 바람을 만날 예정입니다

네 발의 짐승이 되어 불길을 통과하고

나이테와 뿌리를 거쳐

젖은 두 발로 바람과 강물 속을 오래 걸어

흐릿하게

지워져

흰 뼈만 남아 허랑방탕하게 돌아오겠지요

시집이 나오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ㅁ이라고 쓰고

나는

구업에 갇힙니다

흙으로 무너져 태어나는 중이지요

우리는 두 번째 토요일

3-1번 출구에서 모입니다

 

-월간 『시인동네』 2020년 7월호 발표

 

 


 

서안나(徐安那) 시인

1965년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1990년 《문학과 비평》겨울호 등단. 1991년 《제주한라일보》신춘문예 소설부문 가작으로 당선. 저서로는 시집으로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 발달사』 『새를 심었습니다』와 동시집 『엄마는 외계인』.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이 있음. 현재 <서쪽> 동인이며 한양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