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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령 시인 / 풍장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8.

이령 시인 / 풍장

 

 

느닷없이 출몰 한다 골목은

골목을 만나 벽이 된다.

벽은 도처에 있다 벽은

벽을 벗어나야 길이 된다.

길은

층층 그늘이 마수걸이하는 상가 지나 노브랜드가 창의적인 브랜드로 거듭난 햄버거 가게 건너 세상에나 여기서도 카카오 뱅킹이 가능하다고? 첨단 붕어빵 리어카 너머 두릅나무 가시에 걸린 족제비 사체가 건너편 무인 카페 로봇을 향해 칸칸 슬쁨*을 방사 한다 그러니까 여기가 우리들의 오늘, 불가 촉 생의 밀실과 광장의 풍장이구나!

살고 싶다의 어원인 밀실과 살아간다의 어법인 광장이

줌 인, 줌 아웃 되는 지금

밀실이 광장의 통로라는 걸

익숙하다는 건 능숙하게 길들여져 간다는 걸

턱과 입에 마스크를 두 개나 낀 행인이 증명 한다

사람과 사람이 사람 속에서

사람이 사람과 사람 속에서

느닷없이 시나브로 벽이 되고 길이 된다

클라우드 클릭, 밀실과 광장이 빽빽한 지금 여기는

호흡 긴 골목이다

 

*슬쁨-슬픔과 기쁨

 

-계간 『시산맥』 2023년 봄호 발표

 

 


 

 

이령 시인 / 비밀번호 바꾸기

 

 

 신을 믿지 않아 좋은 건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거라서 지금 가슴과 머리는 둥근 사각입니다 내 방은 열쇠가 없고 방향도 없지만 비교적 안전 합니다

 모서리는 모서리를 만나 벽이 됩니다 모서리를 등지면 방이 되기도 하지요 더러는 절망이 출몰해 잠시 잠겼을 테지만 주관적으로 비밀번호를 거듭 호출하면 됩니다

 밤새 기억을 편집하느라 어지럽지만 탄성이 충분한 나의 믿음은 당신에게 오래 깃든 주술 입니다

 셈을 익히고 책장과 방의 평수를 넓히는 동안 내가 익힌 좌표는 탄력적으로 길을 인도하지만 슬프게도 이 방향은 초지일관 창조적이진 않습니다

 쥬시후레쉬, 후레쉬민트, 스피아민트..., 껌을 씹으면 왜 눈물부터 나는 건지 시간을 재편성하듯 단물이 빠지는 건지 수시로 출몰하는 감성은 어느 지점에서 서성이던 기도 인가요

 오래 품은 의문이 자라는 나의 방은 덕분에 왁자합니다 오늘아침엔 씹던 껌으로 메꾼 깨진 화분 사이 보춘화가 만향(萬香)입니다 당분간 응답은 잊어 야죠 당신의 겹창을 흔드는 바람이 오래 스민 나의노래를 복제 중이거든요

 철새 무리가 주문처럼 딱 딱 딱 허공을 박음질하고 있습니다

 길을 따라가는 것도 벗어나는 것도 먼저 방을 벗어나야 하니까, 열쇠는 잊고 군데군데 구름 방석도 깔아 둔거지요

 느닷없이 방과 하늘이 주문처럼 깊어갑니다

 

-계간 『시와 징후』 2023년 봄호(창간호) 발표

 

 


 

이령 시인

경북 경주에서 출생, 동국대 법정대학원 상사법 전공 석사 졸업. 2013년 《시를사랑하는사람들》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시인하다』,『삼국유사대서사시 사랑 편』와 기타 저서 『울진대왕소나무本 발화법』경상북도 후원. 『시야 놀자!-초등학생을 위한 시작법』교육청예술지원사업. 《문두루비법을 찾아서-Beautiful in Gyeongju》경상북도 출판지원사업선정 출간. 제10회 경주문학상, 제 2회 시산맥시문학상 수상. 현재 웹진시인광장부주간, 동리목월기념사업회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