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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가희 시인 / 민들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8.

이가희 시인 / 민들레

 

 

길모퉁이 처질러

앉아 있는 민들레

반나절

햇살이 와서

깨운다,노란 꽃

 

그 위에

반 평의 햇살도

퍼질러 앉는다

꽃술 속에 든

나비 한 마리

온몸에

파란하늘이 묻어있다

 

 


 

 

이가희 시인 / 숨 쉬는 일에 대한 단상

 

 

항아리 속 검은 보자기 아래

노란 꽃술들

살짝살짝 보자기들 들어 올리며

고르게 숨을 쉰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끼얹은 때면

하루가 다르게 살 차 올라

마치 둥근달 보는 것 같은데

물관부를 따라 물 길어 나르는

노랫소리에 맞춰4분 음표들이

방안을 뛰어다닐 것 같은데

 

숨 쉬는 일이란,

틈새를 비집고

촘촘한 영토를 다스리는 일이다

고개는 떨구었지만

단 하나뿐인 내生을

수직 상승시키는 일이다

 

 


 

 

이가희 시인 / 둔산동. 2

 

 

신도시 길 따라

한 소절 바람에 몸부림치는

이파리 큰 초년생 플라타너스

잔가지가 옆으로 늘어날 뿐

황달 든 누런 잎만 곁가지에 매달 뿐

해가 바뀌어도 몸통 굵어지지 않는다

영어, 수학, 컴퓨터, 피아노......

초등학생들 목에 맨 가방처럼

늘어져 지친 가지가

하늘을 뒤덮고 있다

 

난 가위를 들고

목 졸린 시간의 가지들을

싹뚝싹뚝 쳐나간다

얼마 지나자, 그의 가슴에서

새근대는 작은 숨소리가 들린다

흰 구름을 처음 보았다고

새소리, 바람소리의 귀엣말도 내게 들려준다

아직 온기 남은 새들의 깃털은

가벼움의 자우도 알려준다고

어느덧 푸른 손을 뻗은 그가

내 몸에 전지가위를 댄다

 

 


 

이가희 시인

1962년 충북 보은 출생. 충남대학교, 고려대학교 대학원(문학석사)과 한남대학교대학원(문학박사)을 졸업. 2001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했으며 시집 <나를 발효시킨다> <또 다른 골목길에 서다>와 저서 <한국토종엄마의 하버드 프로젝트> 등이 있다. 2020년 제16회 대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