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아 시인 / 곁에
머리카락은 잠들어 있다 공기 중에서 산호처럼 흔들렸다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쪼개진 석류의 아름다움처럼 꿈의 틈새가 벌어진다 손가락은 꿈에 잠긴다
암실에는 물이 흐른다 네 혈관 속 물고기가 피워 올린 노래들 돌멩이의 형상으로 물속 깊이 가라앉는다 우주의 하얀 잠속에서 부푸는 이야기처럼 돌멩이가 자란다 물결은 돌의 꿈을 방문한다 꿈이 느리게 용해된다 손가락은 물의 뿌리처럼 돌멩이를 감싸 쥔다 네 몸속 심장처럼
내 귓속 초록 밀밭을 불태우며 가꾸는 것들 네 심장 소리는 모스부호처럼 외롭고 단단한 문장으로 도착한다 너는 물기 많은 계절을 부른다 나는 장님처럼 또렷하고 모호한 너의 살갗을 쓰다듬는다
-시집 『로라와 로라』에서
심지아 시인 / 오전의 스트레칭0
책상과 팔이 닿는다. 책상의 온도가 살갗으로 전해진다. 추위가 떠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나는 소매를 끌어당겨 추위를 떠날 것이다.
-시집 『애인』, 민음사, 2018
심지아 시인 / 악몽일기
악몽일기 이 두 단어 사이에는 빈칸이 없어야 한다 악몽일기 한숨에 몰아 발음해야 한다 악몽일기 그것은 가장 깨끗하게 씻긴 형식일 것이다 악몽일기 내가 꾸는 꿈에는 소리가 없다 들을 수 있다 악몽일기 물에 잠겨 흔들리는 악몽일기 잎과 줄기와 뿌리의 구별이 없는 이야기들 악몽일기 모든 생생함은 미끄러웠다 더 미끄러웠다 악몽일기 미소에는 미소 아닌 것이 섞여 있다 악몽일기 그것을 골라내는 손가락이 침묵한다 악몽일기 의자와 테이블을 하나하나 꺼트리며 악몽일기 반짝이는 검은 고양이의 세계로 악몽일기 검은 봉투에서 청사과를 꺼내다가 검은 봉투에서 악몽일기 아늑하다면,둘레가 아늑하게 폭 싸인다면 악몽일기 씨앗들,사뿐하게 숨 쉬는 씨앗들 악몽일기 꿈에 싸인 아이와 천변을 걷는다 악몽일기 이상한 활기를 걷는다 악몽일기 독버섯처럼,나는 식욕을 느낀다
심지아 시인 / 공원
공원은 다른 것을 의미했다 공원에서는 꺼낼 수 있었다 크림이 두텁게 발린 빵 새가 어깨로 내려앉는 기분 여름이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소리 펼쳐 놓은 직물의 엷은 고요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웠다가 다시 떨어트리는 일 식물이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의 오랜 우아함 생물의 섬세한 세부 구조를 신의 장소처럼 바라보는 어눌하고 어눌한 사람들 풀밭에 앉아 이도 저도 아닌 생명체가 되어 가는 일 구름 위로 엉뚱한 말들을 적으려다가 그보다는 신선한 구름을 갓 지어진 갓 허물어진 구름을 나는 또다시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겠지 네가 걸어 나온 공원에서 얇은 초록들 볕을 마시는 소리 들리는 잎맥보다도 더 가느다란 고요 여무는 풀밭에 앉아 나는 구별되기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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