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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명자 시인 / 석양증후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7.

황명자 시인 / 석양증후군

 

 

저물녁이면

불안보다 더 떨림이 깊은,

초긴장 상태의 두려움이 몰려오곤 하지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앙가슴이 벌렁대는 느낌이랄까

 

당신은 날 두려움에 떨게 해요

 

호소해 보지만 이미

엄마 배 속에서부터 생겨난 감정을 어쩔 수 없지

엄마가 너무 힘들어하네?

그래도 엄만 날 버리지 않을 거야

생사의 기로에서 태어나기 전까지

불안에 떨었을 감정,

아픔과 슬픔이 합쳐진 감정, 어쩌면

생명체로서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이자

죽음 앞에서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 바로 두려움이

석양과 함께 온다네

 

-「당분간」(2022, 詩와에세이)

 

 


 

 

황명자 시인 / 불행의 씨앗

 

 

도시를 가로지른 강변을 걷는다

어디서부터 합류했는지 모를

사람들로 갑자기 강변이 복잡하다

정체된 출근길 같기도 하고

패잔병들의 행군 같기도 한 사람들로

강의 풍경을 즐길 여유도 없이 떠밀려 걷고 있다

넋 나간 듯 걷는 사람들,

목줄을 한 채 주인에게 이끌려 산책 나온 개들 같다

목줄에 끌려가면서도 마냥 신나 하는 개들보다

만화영화에나 나오는 인조인간처럼

얼굴 반은 마스크로 덮고 눈동자는 방향이 없어

표정이 가늠이 안 된다

무작정 걷는다

미세먼지로 뒤덮인 도시의 강변이거나 말거나

녹조 가득한 강물이 흐름을 멈추거나 말거나

그림자를 판 사나이*처럼 그림자를 팔아먹고도

점점 불행에 빠져가는 줄 모르고 걷기에만 열중한다

이미 불행을 알아챈 것 같은 그들은

불행의 씨앗을 찾아 떠나는 행군을 매일같이

연습하듯 걷고 있다 불안감에 떠는 그들은

입마개를 한 맹견들처럼

마스크로 코와 입을 더욱 옥죄면서 걷기를 반복한다

입이 있어도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되어간다

*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작품으로 악마에게 그림자를 팔면서부터 주인공 페터 슐레밀이 불행에 빠지게 된다는 이야기.

 

 


 

 

황명자 시인 / 평생을 잃고 치매를 얻었다

 

 

소리를 못 듣는 귀는

이제 쫑긋거리지 않고

두 눈동자엔 흐릿하지만

슬픔이 그렁그렁 고였다

숨을 거두고도

닫히지 않는 귀라는 감각,

그래서 망자를 부르는 소리

곡소리

원망하는 소리

다 듣고 간다는데

생전에 귀 어두웠던 사람도

숨 끊어지는 순간에는

듣고 싶은 소리 다 듣고 가려고

영혼을 붙들어 놓는다고 들었다

귀가 어두워지자

평생을 잃고 치매를 얻은 개,

귀에다 대고 말 인심 쓰듯

못다 한 말 꾸역꾸역 밀어 넣어 준들

무슨 소용이랴

개의 소명은 잘 듣고 잘 짖는 건데

집 안에서 못 짖도록 훈련받아

귀의 쓰임이 한정된 견생(犬生),

주인 오는 소리나마 반응하던 두 귀는

창틀에 놓인 빈 화분처럼 무용지물 되고

정신은 주인의 들고남에 무심해졌다

산책 갈까, 말에도

고개만 갸우뚱하는 늙은 개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기적처럼 귀가 열린다면

꽃무릇 붉디붉은 9월의 산책길에서

콧등 꽃물 들도록 킁킁 맡아대던 꽃향기처럼

향긋한 말 한마디, 꼭 들려주고 싶은데

너무 늦지는 않겠지?

 

 


 

황명자 시인

경북 영양에서 출생. 1989년 월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으로 『귀단지』 『절대고수』 『자줏빛 얼굴 한 쪽』 『아버지 내 몸 들락거리시네』 『당분간』가 있음. 산문집 『마지막 배웅』. 2014년 대구시인협회상 수상.